가정부 어머니를 기다리며
닥치는 대로 책을 읽던 소녀가
성공하기까지 드라마틱한 삶
“난 비관주의자이며 흑인
언제나 페미니스트입니다”
작가가 갖는 인간으로서의 매력이 강렬할 때, 작가의 삶이 드라마틱할 때, 그리고 더 나아가 그 작가의 작품도 자신의 삶에서 나온 것이 분명할 때면, 소설보다 작가를 앞세워 소개하고픈 유혹을 느끼곤 한다. 옥타비아 버틀러는 바로 그런 작가의 전형이고, 나는 이 유혹에 굴복해 보기로 했다.
옥타비아 버틀러는 1947년 미국 패서디나에서 태어나 가정부 어머니 밑에서 자라났다. 검은 치마에 하얀 앞치마를 두르고 백인의 저택에서 일을 하는 가정부였다. 버틀러는 어머니의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지루해 구해지는 책을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고, 12살에 어떤 과학소설(SF) 영화를 보고 나도 저것보다는 더 잘 쓸 수 있다고 생각하며 처음 작가를 꿈꿨다.
버틀러는 글을 쓰고 싶었지만 가난했고, 흑인이었고, 여성이었다. 게다가 극도로 내성적이었고, 난독증이 있었고, 돈이 없어 치과를 가지 못해 치열이 엉망이라 말을 할 때면 입을 가렸다. 그는 슈퍼마켓 청소부, 창고 짐꾼, 공장 노동자 같은 육체노동으로 학비를 마련해 오로지 집에서 가깝고 학비가 저렴하다는 이유로 패서디나 전문대를 졸업했다. 그는 캘리포니아주립대학에서 들을 수 있는 수업을 들으며 공부를 계속하고 작가를 꿈꾸었지만, 쉽지 않았다.
그의 재능이 발견된 계기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인종차별과 혐오 사건이었다. 1965년 로스앤젤레스에서는 백인 경찰의 과잉 진압에서 시작된 와츠 폭동(혹은 와츠 혁명)이 일어난다. 수천명의 경찰이 투입되었고 사망자만도 34명에 달한 인종 충돌사건이다. 이 사건 이후 지역사회에 깊어진 흑백간의 골은 쉽게 메워지지 않았고, 미국작가협회 서부지부는 할리우드에서 배제된 소수인종 커뮤니티를 위한 무료 작가 워크숍인 ‘오픈 도어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버틀러는 대학 게시판에서 안내문을 보고 워크숍에 찾아갔다. 이 수줍음 많고 돈 한 푼 없는 22살 여성은 어떻게든 글을 쓰고 싶었고, 혹시 TV 시트콤 대본 같은 것을 쓰면 조금이라도 돈을 벌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버틀러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이 프로그램의 강사였던 할란 엘리슨이었다. 그는 버틀러의 탁월한 재능을 금세 발견했다. 버틀러가 써 온 시트콤 대본은 형편없었지만, 버틀러에게는 그 이상의 가능성이 있었다. 백인은 백인들끼리, 흑인은 흑인들끼리 나뉘어 지내던 시절이었다. 엘리슨은 그를 (골목을 돌 때마다 두 사람을 대놓고 흘겨보는 백인들로 가득한) 베버리 힐스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작가가 되라고, SF든 아니든 진지하게 글을 써 보라고 말하고, 클라리온 워크숍 참가를 추천했다. 클라리온 워크숍은 당시 엘리슨을 비롯한 SF와 판타지 작가들이 작가지망생이나 신진작가들을 집중적으로 교육하고 배출하기 위해 만든 프로그램이었다.
1970년 버틀러는 어머니가 딸의 치과 치료를 위해 모아 둔 돈을 탈탈 털어 클라리온 워크숍 참가비로 썼다. 엘리슨이 캘리포니아에서 펜실베니아까지의 교통비를 댔다. 그렇게 참가한 워크숍에서 버틀러는 단편소설 두 편을 완성해 팔 수 있었고, 작가 인생이 시작되었다. 버틀러는 그 다음에도 여전히 공장에서 일하고 슈퍼마켓의 쓰레기통을 비웠지만, 글을 계속 써 나갔고, 1977년 첫 장편소설을 파는 데 성공했다. 그때 받은 고료 1,500달러는 버틀러가 평생 벌어 본 가장 큰 돈이었다고 한다. 버틀러는 1979년 전업작가가 되었다.
버틀러는 당시 SF계에 극소수였던 흑인 작가였을 뿐 아니라, 글로 먹고 사는 데 성공한 최초의 흑인 ‘여성’ SF 작가였다. 어머니의 청소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SF를 읽던 여자아이, 사교성이 너무 없어 엘리슨이 “저 사람을 놓치지 말아 달라”고 다른 작가들에게 따로 당부까지 해야 했던 작가지망생, 사람들 앞에 나서기 힘드니 작가 사인회를 하지 않으면 안 되냐고 출판사에 부탁하던 내향적인 신진 소설가는 글을 결코 놓지 않은 끝에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비관주의자, 흑인, 언제나 페미니스트”라고 소개하고, 글이 자신을 구원했다고 말하는 소설가가 되었다. 버틀러는 SF작가 중 최초로 맥아더 상(소위 ‘천재’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존재 자체가 성취였고 그의 소설들은 한 편 한 편이 SF계의 더 큰 성취였다.
이런 버틀러의 대표작이 바로 장편소설 ‘킨’이다.
킨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ㆍ이수현 옮김
비채 발행ㆍ520쪽ㆍ1만4,500원
블러드 차일드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ㆍ이수현 옮김
비채 발행ㆍ284쪽ㆍ1만3,000원
야생종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ㆍ이수영 옮김
오멜라스 발행ㆍ490쪽ㆍ1만4,000원
LA에 살고 있는 가난한 흑인 여성이자 작가지망생인 다나는 직업소개소에서 만난 백인 남성 케빈과 결혼을 한다. 그러나 살림을 합친지 얼마 되지 않아, 다나는 갑자기 가혹한 노예제도가 아직 시행 중이던 1815년 메릴랜드주에 뚝 떨어지고, 그곳에서 백인 꼬마 루퍼스의 목숨을 구한다. 그 뒤로 다나는 자신의 뜻에 반하여 현대와 과거를 오가는 시간여행을 한다. 자신이 흑인이고, 노예이고, 여성인 시대에서 자신이 흑인이고, 가난하고, 여성인 시대 사이를 타의로 오가며 다나가 겪는 고통과 혼란은 처절하고 생생하다. 노예제도하 흑인들의 가혹한 삶, 당연히 자유민으로 자라난 다나가 19세기에서 당면한 폭력에 굴복할 때마다 느끼는 굴욕감과 좌절감, 다나의 케빈에 대한 애정과 자신을 과거로 불러들이는 루퍼스에 대한 애증. 억압받는 자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연대감, 연대로도 막을 수 없는 고통들. ‘킨’은 시간여행물이고 SF고 역사소설이지만, 그 어떤 말로도 완전히 설명할 수 없는 풍성한 경험이다.
좋은 소설은 독자의 삶에 독서 이상의 경험이 된다. 버틀러의 작품은 ‘킨’ 외에도 ‘블러드차일드’, ‘야생종’이 번역되어 있다. 그의 작품들은 당신이 지금까지 읽어본 어떤 SF와도, 아니 어떤 소설과도 다를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이런 건 생전 처음이야”라고 말할 기회를 만나기란 참으로 어렵다. 장담하건대, 버틀러는 당신에게 그런 기회가 되리라.
정소연 SF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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