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듯한 일정에 적폐청산만 요란
양극화ㆍ가계부채 등 공약 피상적
촛불 민심서 확인된 과제들
국론ㆍ사회통합 방안 내놔야
사드 등 안보도 명확하게 제시를
조기 대선이 47일 앞으로 다가왔지만 유권자가 차기 정부의 미래 비전을 가늠해 볼만한 정책이슈는 실종 상태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심판 정국에서 다른 이슈는 모두 묻히고 정권교체와 적폐청산의 구호만 요란하다. 하지만 박 대통령 파면 이후 정권교체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유권자들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과거가 아닌 미래로 향하는 모양새다. 혼돈의 시기, 흐려진 시대정신을 누가 또렷이 짚어내느냐가 남은 초단기 대선 레이스의 주요 변수가 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시대정신과 함께 비전도 실종
과거 대선에서는 시대정신을 정확히 짚은 후보가 대체로 승리했다. 2012년 18대 대선의 경우 ‘경제민주화’와 ‘보편적복지’를 두고 대결이 펼쳐졌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당선된 17대 대선에서는 ‘뉴타운’으로 불리는 주거정책이 유권자의 선택을 가르는 주요한 화두가 됐다. 16대 대선에서는 지방분권을 철학으로 하는 신행정수도 공약을 내세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승리했다.
하지만 이번 대선에서는 국가적 미래 비전으로 꼽을 만한 이슈가 실종됐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주요 대선주자들은 적폐청산과 국가대개혁만 외치고 있다. 하지만 그에 따른 구체적 정책 과제나 실현 과제는 내놓지 못하는 상황이다.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은 “적폐청산을 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는 강한데, 정치권이 지금까지 제시한 과제는 허술하고 의례적인 수준”이라며 “세상을 바꾸자는 민심의 높이를 정치권이 못 따라 가고 있다”고 평가했다.
예비후보등록부터 선거까지 240일간 이어지던 대선 레이스가 헌법재판소 선고 이후 60일 간의 단기전으로 변한 상황도 한몫 했다는 평가다. 하지만 빠듯해진 대선 일정을 감안하더라도 대선주자들의 준비부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과 교수는 “1,344조3,000억원에 달하는 가계부채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도, 금융규제를 어떻게 할 것인지 공론화가 전혀 안 되고 있다”며 “대선 주자들이 이슈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대부분의 정책 공약이 피상적 수준에 머무른다”고 꼬집었다.
차기 대통령은 2달여 간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체제 없이 곧바로 임기를 시작해야 한다는 점도 주요 주자들이 좀더 분명한 국정운영 비전을 제시하고 국민의 선택을 받아야 하는 이유로 꼽힌다. 자칫 새 정부 출범 이후에도 국정공백이 장기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최병호 부산대 경제학과 교수는 “과거 대선에서는 정책ㆍ공약이 다소 두루뭉실해도 인수위를 거치면서 정교하게 다듬을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다르다”며 “대선 과정을 정치논쟁으로 일관하며 정책대결을 피한다면 국가적 위기에 직면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양극화와 안보위기 최우선 과제
전문가들은 ‘대연정’, ‘소연정’ 식의 정치 구조를 둘러싼 뜬 구름 잡기식 공방이나, ‘선한 의지’ 공방과 같은 실체 없는 가치 논쟁은 대선 주자들이 가급적 지양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대신 ‘촛불 민심’에서 확인된 시대적 과제와 관련해 실질적이고 구체적 정책 방안을 내놓아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대내적으로는 양극화 문제의 해결에 집중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국일보가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1월 15,16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유권자들은 대체로 경제적 격차 해소를 차기 정부가 해결해야 할 최우선 국정과제로 꼽았다. ‘경제 양극화 완화’(20.7%) 응답이 가장 많았고 ‘경제 성장’(17.3%), ‘삶의 질 개선’(14.2%) 등의 먹고 사는 문제가 주로 언급됐다.
특히 국가적 목표와 비전을 세우는 것만큼이나, 국론을 모으고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는 데 힘을 쏟는 게 중요하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김한권 국립외교원 교수는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ㆍ사드) 문제나 북핵 문제와 관련한 우리의 국가적 목표와 이익이 무엇인지 이번 대선을 통해 분명히 확인해야만 닥쳐올 외교ㆍ안보 위기의 파고를 넘을 수 있다”고 제언했다. 김 교수는 그러면서 국론통합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그는 “사드 배치가 국민적 논의 없이 결론 나 국론이 분열되면서 미국은 조기 배치 드라이브를 걸고, 또 중국에게 제제의 빌미를 준 측면이 없지 않다”며 “이번 선거를 국론을 모으고 국민적 합의를 이뤄가는 과정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동현 기자 nan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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