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 순방에서 기대와는 달리 ‘중국에 고개 숙이는’ 외교를 했다며 낙제점 평가를 받은 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이 이번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ㆍNATO) 동맹국을 불안하게 하고 있다. 틸러슨 장관이 나토 회의를 불참하면서 미ㆍ중 정상회담에 관여한 후 러시아를 방문할 계획이라는 보도가 나왔기 때문이다. 유럽 동맹국을 무시하고 중국과 러시아 등 경쟁 강국 외교에 공을 들인다는 나토 동맹국들의 의심에 부채질을 한 셈이다.
로이터통신은 20일(현지시간) 틸러슨 장관이 4월 5~6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리는 나토 외교장관 회담에 불참할 방침이라고 전했다. 내달 플로리다주 팜비치 마라라고리조트에서 열릴 예정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간 정상회담과 일정이 겹친다는 이유다. 로이터통신은 또 틸러슨 장관이 10~11일 주요7개국(G7) 외교장관회의를 거친 후 12일 러시아를 방문할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미국 외교의 최고책임자가 동맹은 뒷전이고 그 동맹의 핵심 견제 대상인 러시아와의 회담을 우선시한다는 메시지라는 의심이 자연히 고개를 들었다. 나토 외교장관 회담은 대체로 1년에 2회씩 열리는데, 미국의 국무장관이 회담에 불참하는 것은 2003년 콜린 파월 당시 국무장관이 이라크 전쟁 개전 때문에 불참한 이래 14년만의 일이다.
미국내외에서 비판이 이어졌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은 21일 하원 군사위원회에 출석해 “일정을 짜는 사람들이 문제가 있었다. 물론 다른 곳에서도 외무장관을 만날 기회가 있지만, 나토 전체의 방향성을 논의하는 회의라는 점에서 매우 불운한 일정 문제”라고 지적했다. 전직 국방부 관료 짐 타운센드는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에 “미국은 엄연히 나토를 주도하는 국가인데 국무장관이 회의에 빠지는 건 있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날 워싱턴을 방문한 옌스 스톨텐베르크 나토 사무총장은 공식적으로는 틸러슨 장관의 불참 방침에 대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임스 매티스 미국 국방장관과 만난 자리에서는 “불확실성의 시대에 나토 같은 국제기구의 강화가 중요하다”며 틸러슨 장관의 나토 외무장관 회담 불참 결정에 우회적으로 불만을 표했고, 공영라디오 NPR과의 인터뷰에서는 “틸러슨 장관이 회의에 오길 희망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국무부는 다급히 진화에 나섰다. 마크 토너 국무부 대변인 대행은 우선 “22일 워싱턴에서 열리는 반 이슬람국가(IS) 국제 연대 외교장관회의에서 대부분의 나토 외교장관을 만날 것이므로 문제가 없고, 나토 장관회의에는 틸러슨 장관 대신 톰 섀넌 정무국장이 참석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아직 국무부 차관을 임명하지 않고 있기에 정무국장이 차관대행을 맡고 있다. 토너 대행은 “트럼프 대통령이 5월에 열릴 나토 정상회의에 확실히 참석할 것”이라며 “미국은 나토를 100% 지지한다”고 덧붙였다.
그럼에도 논란이 가라앉지 않자 국무부는 “나토와 외교장관 회의 일정 변경을 협의 중”이라고 한 발 물러섰다. 나토 측은 “일정 변경을 검토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며 참가 28개국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고 밝혔다. 오히려 “당초 나토가 틸러슨 장관 참여를 위해 대체일정을 제안했지만 미국 국무부가 거절했다”고 반격하기도 했다.
유럽의 미국에 대한 의심은 당분간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수시로 “나토는 낡아빠졌다”거나 “나토 동맹국들이 미국에 기대지 말고 충분한 군사비를 투자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의회 연설에서는 “나토를 강하게 지지한다”고 말했지만, 정작 워싱턴을 차례로 방문한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앞에서는 속 시원한 ‘동맹 지지’ 선언을 내놓은 바가 없다. 틸러슨 장관은 22일 공개된 인터내셔널 저널 리뷰(IJR)와의 인터뷰에서 이를 “트럼프만의 말하기 방식”이라며 “동맹국들이 자국 국방에 대한 투자를 늘릴 것을 검토할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옹호했다.
더구나 미국 연방조사국(FBI)이 트럼프 대선 캠프와 러시아 정부 간 연결고리를 조사 중이라고 발표하면서 ‘트럼프-러시아 커넥션’에 대한 유럽 동맹국의 불안이 더욱 커지고 있다. 4월 중순 러시아로 향할 예정인 틸러슨 장관 자신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친밀해 2013년 러시아에서 외국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 훈장인 우애훈장을 수여 받은 바 있다.
인현우 기자 inhy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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