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의 주주총회가 열리고 있다. 주총장에 미리 배포된 인사말을 읽어 내려가는 기업 최고경영자(CEO)의 발언으로 시작되는 주총은 올해도 큰 이변 없이 마무리되는 분위기다. 그래도 CEO가 올해 경영 계획을 주주 앞에서 처음 밝히는 자리여서 그 의미는 남다르다.
제너럴일렉트릭(GE) 등 글로벌 기업들은 조금 방식이 다르다. 이들 기업의 CEO는 주총을 한 달여 앞두고 미리 주주들에게 발송하는 연차보고서에 CEO 레터를 담아 사업전략과 운영 방향 등을 알린다. 주주들은 이를 근거로 해당 CEO를 주총에서 재 신임할지를 판단한다. 때문에 CEO들은 바쁜 일정에도 CEO 레터를 정성 들여 직접 작성한다.
올해로 17년째 GE의 CEO를 맡고 있는 제프리 이멜트 회장은 투자자들의 이해와 신뢰 확보를 위해 직접 CEO 레터를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지난달 말 CEO 레터에 놀랍게도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보호무역주의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하는 의견과 경영계획 등을 무려 8페이지에 걸쳐 담았다. 결론은 간단 명료하다. GE는 자유무역을 반대하는 트럼프 정부의 정책기조에 반대하며 GE의 핵심경영 방침인 세계화 전략을 고수하겠다는 것이다. 이멜트 회장은 GE의 세계화 전략에 근거한 사업성과에 대한 자긍심도 내비쳤다. “GE가 해외에 공장을 운영하는 것은 값싼 노동력 때문이 아니라 GE제품을 팔기 위해 해외시장의 기반을 넓히는 포석”이라는 것이다. 이멜트 회장은 “보호무역주의 시대에도 세계화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GE의 경쟁력 우위는 앞으로도 확대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정부정책에 반기를 든 셈이다. 레터의 발송 시점은 더 놀랍다. 레터가 발송되기 1주일 전 트럼프 대통령은 이멜트 회장과 마크 필즈 포드자동차 CEO 등 미국 제조업을 대표하는 24개 기업 대표들을 백악관에 초청했다. 트럼프는 이 자리에서 보호무역주의를 역설하며 미국 내 일자리 재창출에 기업들의 지원을 요청했다. 그리고 1주일 후 이멜트 회장은 이를 대놓고 비판한 편지를 주주들에게 보낸 것이다. 이는 정부 정책 기조에도 흔들림 없는 GE의 핵심 가치와 경영전략을 주주들에게 직접 설득함으로써 GE에 대한 지속적인 신뢰와 투자를 이끌어 내려는 CEO의 소신 있는 경영 철학인 셈이다.
우리 경제계 풍토를 볼 때 이 같은 CEO를 만나기는 아직 이른 것 같다. 새 정부가 출범하면 대통령이 청와대로 대기업 총수들을 불러 간담회를 연다. 총수들은 으레껏 선물 보따리를 펼쳐 놓는다. 이른바 경제 활성화를 위한 기업 투자ㆍ고용 계획이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발표되는 기업의 투자ㆍ고용 계획은 부풀려 있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명박 정부 당시 총수들이 청와대에서 밝힌 계획은 1년이 지나도록 평균 60%도 이뤄지지 않았다. 반면 박근혜 정부에선 호응도가 꽤 높았다. 창조경제혁신센터에서부터 청년희망펀드, 미르ㆍK스포츠재단 설립 모금까지, 기업들은 ‘선의의 차원’에서 지원금을 몰아줬다. 줄 것은 주면서 챙길 것은 챙기는 것이 상도의 기본원칙. 그것이 경영권 세습을 위한 혜택이거나 사업 규제를 풀어 주는 대가였을 수 있다. 기업은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특검에 이어 검찰의 기업 수사가 반복돼도 반 기업 정서는 하늘을 찌를 태세다. 경제 위기에도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목소리는 듣기 어렵다. 경제마저도 모두 정치화돼 대기업은 모두 재벌이고, 재벌은 전부 개혁 대상이다. 새 정부에서도 분위기가 바뀌기는 어려워 보인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대비하고 수출주역이자 일자리 창출의 근원이 돼야 할 기업들이 적폐 청산의 대상이 돼야 하는 현실은 암담하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싱크탱크인 ‘정책공간 국민성장’ 소장을 맡은 조윤제 전 서강대 교수는 재벌개혁을 “빌딩 안에 갇힌 코끼리를 건물을 부수지 않고 꺼내는 작업” 이라고 표현한다. 과연 빌딩에 갇힌 코끼리를 빼낼 수 있는 마법은 가능할 것인가. 그는 재벌의 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계열사 분화와 전문경영진 체제 도입, 지주회사 전환을 유도하겠다고 한다. 총수 일가의 세습경영이 아니라 인재들이 기업의 실질적 최고경영자로 부상할 수 있는 길을 터 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누구든 열심히 노력하면 GE의 제프리 이멜트 같은 소신 있는 경영인이 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다. 주주의 입장이 아니더라도 하루빨리 그런 경영인들이 나와 그들이 소신을 갖고 직접 쓴 CEO 레터를 받아 보고 싶다.
장학만 산업부장 trendno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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