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이 21일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다. 최순실 국정농단에 대한 검찰 수사가 시작된 지 5개월 만에 비로소 직접 조사가 이뤄진 것이다. 검찰의 전직 대통령 조사는 이번이 네 번째다. 또다시 전직 대통령이 검찰에 소환되는 모습을 지켜보는 국민의 심정은 착잡하기만 하다. 이런 일이 다시는 없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잘못을 분명하게 규명하고 엄정하게 처벌해야 한다.
그 첫 단계는 박 전 대통령의 진솔한 사과와 성실한 답변이다. 하지만 검찰에 나온 박 전 대통령은 이번에도 국민의 기대를 저버렸다. 그는 서울중앙지검 청사 앞 포토라인에 서서 “국민 여러분께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성실하게 조사에 임하겠습니다”는 단 두 문장만 내놓은 채 조사실로 향했다. 불과 6초 동안 ‘29자’의 형식적 입장을 밝히는 데 그쳤다. 국정농단 사태로 헌정 사상 최초로 파면된 데 대한 반성이나 사과는 물론이고 국민통합을 위한 메시지도 없었다. 국민의 용서를 구할 마지막 기회마저 스스로 거부한 셈이다.
밤늦게까지 진행된 조사에서도 박 전 대통령은 대부분 혐의를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과 특검 수사를 거치며 박 전 대통령에게 적용된 혐의는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수수,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공무상 비밀누설 등 열세 가지에 달한다. 그동안의 수사에서 이를 입증할 숱한 증거와 증언이 확보된 상태다. 재판 중인 핵심 인물들도 법정에서 박 전 대통령과의 관계를 상당 부분 인정했다. 박 전 대통령이 혐의를 부인하더라도 당장 기소하는 데 문제가 없을 정도다. 그런데도 박 전 대통령은 여전히 “모른다”“선의였다” 는 종전의 입장만 되풀이했다고 하니 답답할 노릇이다.
특검 수사 결과를 보면 박 전 대통령은 권력을 동원해 최씨의 이권 챙기기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주도했다. 최씨와 공모해 삼성그룹으로부터 430억원대의 뇌물을 받아 냈고, 사유화된 미르ㆍK스포츠재단에 대기업들이 774억원을 출연하도록 강요한 의혹이 대표적이다. 기업을 압박하거나 혜택을 약속하고 돈을 받아 내는 수법은 선의도 국정 수행도 아닌 범죄 행위일 뿐이다. 최소한의 잘못은 인정하고 대가 관계 등 구체적 법리를 따진다면 또 모를까, 기초적 사실조차 전면 부인하는 식으로는 검찰은 물론 국민을 납득시키기 어렵다.
검찰의 박 전 대통령 조사에는 법과 원칙만 있을 뿐이다. 사법처리 여부 결정도 마찬가지다. 법원은 통상 사안의 중대성과 증거인멸 우려, 도주 우려를 고려해 검찰이 청구한 영장을 발부한다. 사안이 중대하다는 데는 이견이 없으며, 혐의 전면 부인은 증거 인멸이 우려되는 대목으로 해석할 수 있다. 더구나 최씨 측에 뇌물을 건넨 혐의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구속된 데다 박 전 대통령의 지시를 수행한 청와대 수석과 비서관, 장ㆍ차관이 줄줄이 구속된 마당이다. 이들과의 형평성을 따지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정치권 일각에서는 ‘불구속 수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전직 대통령이라는 ‘특수 신분’과 정치적 상황 등 다른 변수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결정이 어려울수록 법과 원칙을 기준으로 삼는 게 옳다. 김수남 검찰총장도 헌재 탄핵 인용 후 긴급 간부회의에서 “검찰은 법과 원칙에 따라 본연의 임무를 의연하고 굳건하게 수행하라”고 당부한 바 있다. 최근 검찰의 신뢰가 추락한 결정적 이유는 정치적 중립을 지켜 내지 못한 데 있다. 명예가 나락으로 떨어진 검찰로서는 정치적 고려로 좌고우면할 이유가 없다. 검찰은 최대한 신속하게 박 전 대통령의 사법처리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신병처리 결정이 늦어질수록 국민적 혼란만 가중될 가능성이 크다.
헌재의 탄핵 결정은 잘못을 저지른 권력을 질서 있게 퇴진시켜 우리 민주주의의 높은 수준을 보여 줬다. 박 전 대통령 수사와 사법처리도 훼손된 헌정 질서와 법치주의를 회복하는 도정(道程)이어야 한다. 검찰의 책임이 정말 무거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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