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평화가 들꽃처럼 만발하며, 희망이 무지개처럼 꽃피는 나라." 듣기만 해도 가슴 떨리는 이 말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주요 연설 때마다 즐겨 사용하던 문구다. 그는 이 말 이상으로 "정치는 살아 있는 생물,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란 말도 자주 썼다. 엄혹한 시절을 건너면서 체득한 우리 정치의 가변성과 역동성을 지적하며 섣불리 단정하거나 포기하지 말라는 자기 최면성 주문이었던가 싶다. 대선 불출마 약속 번복 등 자신의 잦은 말 바꾸기를 합리화하는 말이기도 했다.
▦ DJ 적자를 자임하는 박지원 국민의당 대표도 주요 정치 이벤트가 발생하거나 정국향배를 진단할 때 이 말을 즐겨 쓴다. 지난해 연말 탄핵정국에서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가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을 때 아쉬움, 그리고 올 초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불투명한 행보를 계속할 때 거부감을 드러내며 "정치는 생물이어서, 셔터를 내려도 어떤 변화가 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바른정당과의 연대설이 나올 때도 강한 부인과 함께 "정치는 생물인데 대선에 임박한 시점의 일을 지금 어떻게 알겠느냐"고 답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 '지존의 지지율' 구가하는 문재인도 이런 어법에 매력을 느낀 것일까. 그는 얼마 전 민주당 경선 토론회에서 탄핵정국 때의 말바꿈을 추궁받자 "정치는 본래 흐르는 것이고 촛불 민심을 따라가는 게 정치인의 자세"라고 진화된 '정치생물론'으로 응수했다. 후속 토론회에서 마구잡이 영입이 도마에 오르자 그는 "정권 교체는 강물이 흘러 바다에 도달하는 것과 같다. 자기 물만 고집하면 시냇물밖에 안 된다. 많은 물을 모아야 한다"고 대꾸했다. 흐르는 강물처럼 유연하게 움직이되 여기저기서 많은 물을 품어야 큰 물결을 이룬다는 이른바 '강물론'이다.
▦ 박지원 대표가 가만 있을 리 없다. 정치란 흐르는 것이라는 변명으로 말바꿈을 호도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정책적 외교적 실책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는 비판이다. 그러나 이 지적은 너무 강퍅하다. 문재인은 '더 준비된' 강물처럼 품을 더 키워야 하기 때문이다. 어제 박근혜 전 대통령이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출두했다. 억하심정을 가누기 힘들겠지만 자승 스님이 언젠가 그에게 소개했다는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는 화엄경 구절대로 흐르듯 그냥 내려놓으면 좋겠다.
이유식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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