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친구가 내일은 적이 되고 약육강식의 혼돈이 거듭된 춘추시대에는 140여 개의 크고 작은 제후국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말려 들었다. 이어진 전국시대에도 천하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전쟁은 거세게 휘몰아쳤다. 시해당한 군주들, 망해 가는 나라들, 거듭되는 전쟁 속에서 백성들의 시신은 길거리로 내동댕이쳐진 격심한 변동기였다. 왕 중심의 권력집중과 행정단위의 재편, 씨족 공동체의 해체, 주술적이고 신정적(神政的) 세계관이 변모하면서 이성적 세계관과 전략적 사유의 제자백가(諸子百家)가 화려한 꽃을 피우게 되었다.
서로 다른 해법을 내놓은 사상가들은 드넓은 중국을 지연이나 혈연에 얽매이지 않고 유세(遊說)하러 다니며 사상을 펼쳐 나갔다. 신분을 초월하여 그들은 직접 왕을 만나 생각을 표출했다. 유가인 맹자(孟子)는 양(梁)나라 혜왕(惠王)이 “노인장께서 천리를 멀다 하지 않고 오셨으니 이 나라에 어떤 이로움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어찌하여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역시 인의가 있을 뿐입니다”(‘맹자’ ‘양혜왕상’)고 하면서 정곡을 찌르는 비유를 들어가며 대나무를 쪼개는 듯한 언변으로 백성들의 편에 선 정치를 할 것을 외쳤다.
물론 맹자의 이런 설득력이 빛을 발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왕도정치는 민생에 이렇다 할 도움을 주지 못하는 사상으로 인식되었다. 맹자의 거침없고 당당한 태도와 달리 그의 주장은 상당부분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었으니, 사마천의 말처럼, “바야흐로 합종과 연횡에 힘을 기울이고 남을 침략하고 정벌하는 것만을 현명하게 여기는 때”였기에 “덕치만 부르짖으므로 가는 곳마다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맹자순경열전’)
유가가 당대의 주류로 자리 잡지 못했으나, 단 한 명의 예외적 인물이 있었다. 바로 탁월한 외교가였던 자공(子貢)이었다. 그는 유가이면서도 결이 확실히 달라 늘 공자의 핀잔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임기응변의 사유를 발휘하여 조국 노나라를 보존하도록 했고 제나라와 오나라 월나라 진(晉)나라 등을 종횡무진으로 다니면서 그들의 형세 그 자체를 뒤흔드는 외교력을 발휘했다. 그는 돈을 잘 굴려 공자의 경제적인 후원자가 되었고 윤택한 삶도 누렸으며 노나라와 위(衛)나라의 재상을 지낼 정도로 관운도 뒤따랐다.
이보다 더 실질적인 병가(兵家)와 법가(法家), 종횡가(縱橫家)로 불리는 자들이 군주의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었고, 그들은 정사에 깊이 관여하면서 정책 결정의 주요한 이정표를 만들었다. 오나라 왕 합려(闔閭)는 손자(孫子)를 장수로 삼아 강국으로 거듭났으며, 초나라와 위나라도 오기(吳起)를 등용하여 전쟁을 승승장구로 이끌었다. 상앙(商鞅)은 진나라 효공(孝公)을 세 번이나 만난 끝에 유세에 성공하여 변법(變法)을 주창하여 훗날 통일 진나라의 초석을 다지는데 이바지 했다.
생존전략에 뛰어난 자들은 또 있었다. 세 치 혀를 무기삼아 6개 나라의 재상이 된 합종가 소진(蘇秦)은 동방 6국을 세로로 묶는 전략을 취했으며, 그 정반대의 논리인 연횡책으로 무장한 장의(張儀)는 진나라 대세론을 펼쳐 오랫동안 재상을 맡으면서 통일의 기반을 다지는데 기여했다. 물론 사마천은 이들의 활동을 비판적으로 보아 “권모술수와 임기응변에 능한 유세가”로서 “나라를 기울게 만든 위험한 인물”(‘장의열전’)이라고 했으나 결국 춘추오패(春秋五覇)니 전국칠웅(戰國七雄)이니 하는 개념들이 이들과 같은 책략가들의 손에 의해 좌우된 것은 거의 분명했던 것이다.
이들처럼 왕이나 제후들에게 등용된 자들도 있었지만, 등용되지도 못하고 권력의 다툼 속에서 희생양이 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분서갱유를 단행한 폭군으로 알려진 진시황이 ‘한비자’ 책을 읽어 보고는 “내가 이 책을 쓴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하면서 최측근 이사(李斯)에게 한비자를 물색하라고 지시하여 한비자를 만났다. 진시황은 그 사상의 맥락을 간취하는데 성공했다. 비록 그들 사이의 만남은 비극적으로 끝났으나, 진시황은 한비자의 법가적 사유를 받아들여 능력중심의 인재개방론을 내세웠으며, 천하를 통일하고 나서는 이사의 건의에 따라 군현제 실시와 문자통일, 도량형 통일 등 전반적인 개혁을 단행하게 된다.
나폴레옹, 마오쩌둥, 빌게이츠, 손정의 등이 왜 ‘손자병법’을 늘 곁에 끼고 살았는지, 시진핑 주석이 2년 전, 손자의 삼벌(三伐) 전략, 즉 벌모(伐謀), 벌교(伐交), 벌병(伐兵)을 말하면서, 벌모로서 미국의 모략을 깨뜨리고, 벌교로서 일본의 외교를 치며, 벌병으로 베트남을 무력으로 저지한다는 외교전략을 견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북핵과 사드 문제로 뒤틀린 한중관계, 우리가 미국의 동맹이냐 파트너관계냐 하는 틸러슨의 발언의 와중에 원만한 해결책 모색이나 상황 예의주시, 의사소통 혼선이니 하는 식의 외교적 수사나 단호한 대처라든지 선택의 여지가 없다라는 일도양단식 사고보다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생존전략을 모색했던 제자백가의 전략적 사유들로 사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보는 것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김원중 단국대 한문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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