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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성 칼럼] 보수의 잔인한 봄

입력
2017.03.20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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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는 박근혜 없는 봄 만끽하는데

보수 진영은 좌절과 무기력증에 빠져

긴 안목으로 새로운 인물 키워가야

19일 자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 토론에 앞서 후보들이 페어플레이를 다짐하고 있다. 왼쪽부터 안상수 원유철 홍준표 김진태 이인제 김관용 후보. 연합
19일 자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 토론에 앞서 후보들이 페어플레이를 다짐하고 있다. 왼쪽부터 안상수 원유철 홍준표 김진태 이인제 김관용 후보. 연합

진보 진영이 ‘박근혜 없는’ 봄을 만끽하고 있다. 진정한 봄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 후에야 온다던 그들의 소망이 이뤄진 결과다. 문재인을 비롯한 유력주자들의 지지도 순위나 정당 지지율에서 진보 진영의 봄은 화창하다. 50일 후 철쭉, 장미 화려할 그날의 승리를 예감하는 듯한 분위기다. 물론 최종적으로 어느 진영의 누가 웃을지는 아직 단정하기 이르지만.

반면 보수 진영은 말 그대로 잔인한 봄을 맞고 있다. 박근혜의 빈자리 때문이 아니라 박근혜가 휩쓸고 지나간 뒷자리가 너무나 황폐한 탓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지난 10년 보수 정권의 오만과 독선, 그리고 케케묵은 안보논리와 색깔론, 종북 공세에 안주하면서 나라 안팎의 핵심 현안 해결에는 무능을 드러냈던 결과다. 말로는 국민통합을 내걸고서도 실제로는 배제하고 분열시키기에 급급했을 뿐 진영을 떠나 국민을 감동시킨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는지 기억이 없다.

유력한 보수 후보의 부재는 그런 면에서 당연한 현상이다. 요즘 각종 여론조사에서 보수 진영의 대표선수라고 해 봐야 한 자릿수 지지율을 넘지 못한다.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불출마 선언 후 홍준표 경남지사가 눈길을 끈다지만 위를 쳐다보면 까마득하다. 자유한국당의 지지도는 50%에 육박하는 더불어 민주당의 4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일찍이 정치의 계절에 보수 진영이 이렇게 지리멸렬한 때가 없었다. 황 권한대행 지지표가 이리저리 흩어지는 모습에서도 맘 둘 곳 없는 보수성향 국민의 허탈감과 방황이 잘 느껴진다.

보수의 궤멸을 걱정하고 보수의 분발을 촉구하는 여론이 적지 않다. 건강한 정치가 진보 보수 두 축의 균형과 경쟁 위에 가능하다는 상식에서 당연한 흐름이다. 물론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 내에 보수 회생의 적임자를 자임하는 정치인이 없지 않다. 보수 일각에서는 늘 진보 진영의 화두였던 후보단일화와 연합을 외치기도 한다. 하지만 탄핵사태에 대한 깊은 반성과 자성 없이 ‘박근혜 마케팅’을 당내 대선후보 경선의 전략으로 삼는다면 보수의 회생이나 분발을 기대하기는 불가능하다.

진보 진영으로 권력을 넘겨주는 게 두렵고 싫겠지만 이미 판은 기울었다. 이럴 때는 수단방법 안 가리고 판세를 뒤집으려고 무리를 하기보다는 쿨 하게 잘 지는 길을 택하는 게 현명하다. 현재 보수 진영의 상황은 2007년 대선 때 진보 진영이 처했던 처지와 유사하다. 당시 열린우리당의 후신인 대통합민주신당의 정동영 후보는 처음부터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10년 진보정권에 대한 국민의 피로도도 컸다. 하지만 잘 지는 길을 택하지 않고 무리를 하다가 결국 530만 표 차의 대패를 겪었고, 연거푸 보수 집권을 허용하고 말았다.

어차피 어려운 판에서 보수가 잘 지는 길은 긴 안목으로 미래를 대비하는 기회로 삼는 것이다. 빗나간 박근혜 동정론과 특정 지역정서, 그리고 요지부동의 나이든 세대에 기대어서는 희망이 없다. 진보 진영 후보의 허점을 날카롭게 파고들 엄두조차 못내고 종북 몰이와 같은 구태에 안주한다면 보수의 새로운 활로는 열리지 않는다. 트럼프의 성공을 벤치마킹이라도 하듯이 저질 막말을 일삼아 대중의 관심과 주목을 끌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그럴수록 국민의 마음은 멀어질 뿐이다.

안희정이 주장하는 세대교체와 시대교체가 보수 진영에도 필요하다. 어차피 기성 보수정치인 가운데 조건을 갖춘 대안이 없다면 새로운 인물을 키우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있을 수 없다. 2005년 영국 보수당은 총선에서 패하자 보수개혁의 기치를 내건 39세의 데이비드 캐머런을 당수로 뽑아 2010년 13년 만에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보수의 속성상 세대교체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안정적 변화와 도덕성 등 보수 고유의 가치를 회복하고 젊은 세대의 희망까지 아우르는 새로운 보수의 길은 세대교체가 아니고서는 열기 어렵다. 거듭 태어나겠다는 의지만 확실하다면 이번 봄은 보수 진영에 잔인한 게 아니라 새로운 희망의 계절이 될 수 있다.

논설실장 wk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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