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내부망에 “다행히 패소”
비정상적 관료 문화 신랄 비판
현직 판사가 법원행정처 판사로부터 가족 사건의 선처를 바라는 ‘청탁’ 전화를 받은 적이 있다고 털어놨다. 법원 내 인사와 예산 등 행정을 관장하는 대법원 산하 법원행정처를 중심으로 점차 관료화하고 있는 사법부를 비판하면서 내놓은 ‘양심 고백’이었다.
20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남부지법 정욱도(40ㆍ사법연수원 31기) 판사는 17일 법원 내부 전산망인 코트넷에 ‘관료화의 다섯 가지 그림자’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A4 4장 분량의 글에는 법원행정처 등 사법부의 관료화 문제를 신랄하게 지적하는 내용이 담겼다. 17일은 법원 내 연구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의 학술행사를 연기하라는 등 판사에게 부당한 업무 지시를 내렸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임종헌 법원행정처 차장이 사의를 밝힌 날이다.
정 판사는 ‘(행정처 소속 선배 판사가 전화해) 당시 내가 맡고 있던 사건의 당사자가 자신의 가족임을 밝히며 사건의 내용을 설명했다’며 ‘정황상 선처를 바라시는 것만은 분명했다’고 적었다. 다행히 그 사건에는 전화를 한 판사가 놓친 중요한 쟁점이 있었고, 이를 근거로 ‘선배 판사의 의도와 달리’ 패소 판결을 내렸다고 했다. 정 판사는 ‘만약 그 쟁점이 아니었다면 (그 전화가 내 판단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잘 모르겠다’고 고백했다.
정 판사는 행정처와 사법부의 관료 문화에 대해 지적했다. 그는 ‘관료조직인 행정처에서의 근무 경력이 법관의 양심에 일종의 백도어(비정상적 통로)를 만들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스럽다’고 했다. 사법부의 수직적이고 폐쇄적인 문화가 판사 개개인에게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도 내놓았다.
정 판사는 대다수 법관이 행정처 근무를 내심 바라면서 인사 내용에 신경을 쓰게 된다는 점, 그리고 행정처 근무 이력이 있거나 행정처 입장을 동조해주는 동료를 적으로 돌리려는 점 등이 행정처를 ‘모시는’ 법원 문화가 낳은 적폐라고 꼬집었다. 덧붙여 그는 ‘윗분 지시에 고분고분 따르고 그 심기를 최우선으로 살피는 것을 장려하는 관료적 문화에 젖어있는 이상, 개별 사건에서의 결론을 통해 사회에 제시할 우리의 판단 기준도 관료적으로 편향될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정 판사는 2009년 방송 엑스트라로 일하던 두 자매가 성추행 피해 후 차례로 목숨을 끊은 사건(엑스트라 자매 자살 사건)과 관련, 최근 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자매 어머니에게 무죄를 선고하며 사법부를 포함한 공권력의 한계를 사과하는 ‘반성문’(본보 2월 15일자 14면)을 판결문에 담아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곽주현 기자 z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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