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한심한 사람이고, 더 한심한 엄마입니다. 첫 번째 결혼은 전남편의 폭력으로 금세 끝났어요. 이내 재혼했어요. 딸이 아빠 없는 아이로 자라는 게 싫었거든요. 지금 남편이 연애할 땐 저에게도 아이에게도 다정했고요. 결혼한 뒤엔 남편이 돌변했어요. 기분에 따라 아이에게 함부로 해요. 6세밖에 안 된 아이가 작은 실수만 해도 심하게 다그치고 가끔 때리기까지 합니다. 요즘은 저도 아이를 자주 닦달하게 되네요. 남편이 심하게 하기 전에 제가 먼저 혼내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또 아이를 엄하게 키워야 더는 구박당하지 않는 똑똑한 아이가 될 것 같아서요.
재혼하고 아들을 낳았어요. 결혼 생활을 안정시키고 싶어서요. 지금은 너무나 후회해요. 남편과 시댁 식구들이 딸과 아들을 심하게 차별하거든요. 남편은 딸에게 돈 쓰는 걸 대놓고 싫어해요. 남편과 대화를 시도해 봤지만 벽 같아요. 말로는 자기도 딸을 사랑한다고 하는데 행동은 달라요. 딸 문제로 다투면 “내가 너희를 다 먹여 살리지 않느냐”고 큰소리를 내요. 점점 남편 눈치를 보게 돼요. 저는 경제력이 전혀 없거든요. 친정에 의지할 형편도 아니고요.
딸 아이도 자기 처지를 다 아는 것 같아요. 전혀 아이답지 않아요. 늘 사람들 눈치를 보고 주눅 들어 있어요. 남편 앞에선 감정 표현도 잘 못해요. 인형에 집착하는 것도 걱정스러워요. 딸을 위해선 차라리 이혼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하지만 아이와 먹고 살능력도, 외로움을 견딜 자신도 없네요. 두 번이나 이혼한 여자라고 손가락질 받는 것도 두렵고요.
이혼한 부모님은 어린 저를 외가에 맡겼어요. 외사촌들과 차별받고 자란 터라 딸 아이가 얼마나 괴로울지 잘 알아요. 외숙모는 평소엔 저를 투명인간 취급하다가 사람들이 있으면 따뜻한 척 했어요. 부모님은 끝내 저를 지켜 주지 않았어요. 좋은 남편을 만나 어릴 때 목 말랐던 사랑을 원 없이 받으며 살고 싶었는데, 제 인생은 왜 이렇게 된 건가요? 제가 또 이혼하면 아이들에게 상처가 되겠죠? 저와 아이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아영씨ㆍ가명, 36세, 주부)
“아영씨 얘기를 들으며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어요. 아영씨는 취약하고 가여운 사람입니다. 아영씨 두 손을 꼭 잡고 해 주고 싶은 얘기가 있어요. 아영씨와 딸 아이에게 꼭 필요한 얘기예요.
결혼은 죽을 만큼 사랑하는 사람과 해야 해요. 다른 조건들보다 사랑이 가장 우선이어야 하지요. 아영씨는 그러지 않은 것 같아요. 남편이 잘해 주니까, 혼자 딸 아이를 키우며 살 자신이 없으니까 결혼하지 않았나요? 아영씨 잘못이라고 탓하는 건 아니에요. 아영씨의 그런 선택으로 인해 남편과 관계에서 ‘힘의 균형’이 깨졌고, 그것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라는 얘기입니다.
결혼 생활을 유지하려면 부부가 서로 조심해야 합니다. 배우자가 싫어하는 말과 행동은 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늘 배려해야 해요. 아영씨 남편은 결혼하고 나서 더 이상 조심하지 않는 사람이 됐어요. 결혼을 깰 마음은 없지만 사랑을 지키기 위해 조심할 생각도 없는 상태죠. 한마디로 아영씨가 만만해진 거예요. 분명 남편이 잘못하고 있어요. 하지만 아영씨는 왜 사람들에게 만만하게 보일까요? 사랑해서 시작한 결혼 생활이 왜 그렇게 매번 꼬인 걸까요?
가슴 아프게 들릴지 몰라도, 아영씨가 기여한 부분이 있어요. 전남편이 폭력을 쓴 건 명백한 잘못이고 모두 그의 책임입니다. 전 남편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아영씨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냉정하게 들릴지 몰라도, 이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네요. 그걸 인지하고 극복하지 못하면 앞으로 아영씨와 딸 아이 인생에서 같은 일이 반복될 테니까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지요.
아영씨는 버림받고 거절당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버림받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에 모든 에너지를 쓰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꼭 해야 할 말도 못하고, 당연한 권리도 주장하지 못하고, 기분 나쁜 내색도 못하죠. 아영씨의 그런 태도를 반복적으로 접하는 사람들은 아영씨를 존중하지도, 조심스럽게 대하지도 않게 돼요. 사람의 본성이 원래 그렇습니다.
부모의 이혼을 받아들이는 자녀들의 태도는 나이에 따라 달라요. 사춘기를 지난 청소년은 자신이 이혼을 막지 못했다고 자책하고 무력감을 느낍니다. 사춘기 이전의 아이는 자신이 소중한 존재가 아니라서 부모가 결혼을 쉽게 포기하고 자신을 버렸다고 여겨요. 아영씨도 그랬겠지요. 더구나 아영씨는 외가에 맡겨짐으로써 또 한 번 버려졌다고 느꼈을 거예요. 외숙모한테는 정서적으로 버려졌고요. 그러나 아영씨도, 딸도 버려지거나 거절당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버려지고 거절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야 해요.
아영씨는 다른 사람이 조금만 친절하게 해 주면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합니다. 친근함과 사랑을 헷갈려 해요. 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자이자 부모라고 쉽고 빠르게 믿어 버려요. 왜 그럴까요. 사랑에 대한 아영씨의 결핍이 너무나 크고, 사랑을 너무나 절실하게 원하기 때문이죠.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한 방울 비에 생명체는 본능적으로 입을 크게 벌리죠. 비를 미처 탐색할 겨를도 없이요. 아영씨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남자가 나를 사랑하는 것 같아. 내 배우자이자 보호자이자 부모가 될 것 같아. 내 결핍의 구멍을 채워 줄 것 같아.’ 아영씨는 그런 환상을 보고 결혼했고, 지금은 또 다시 버려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어요. 피할 곳이 없어 비를 쫄딱 맞은 채 바들바들 떠는 어린 새, 그게 아영씨의 모습이네요.
남편은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다만 아영씨와 힘의 균형이 깨진 뒤로 스트레스를 집안에서 가장 약한 존재에게 풀고 있어요. 바로 딸 아이지요. 외숙모가 아영씨에게 그랬던 것처럼요. 남편이나 아영씨가 지금과 똑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면서 아이를 대한다면, 차라리 아영씨 혼자 딸 아이의 보호자이자 부모로 살아 가는 게 딸 아이 입장에서는 오히려 나을 수 있어요.
아영씨는 왜 혼자서는 부모이자 보호자로서 역할을 잘 해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할까요. 아영씨는 어린 시절 정서적 보살핌을 받은 경험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 부모나 보호자의 역할은 경제적 보호가 전부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딸 아이는 돈이 별로 없어도 아영씨와 오순도순 살고 싶을 거예요. 딸 아이가 충분히 보호받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어린 아영씨가 느낀 고통을 그대로 느끼지는 않을까요? 딸 아이는 엄마가 옆에 있기 때문에 더 많이 아플 겁니다. 엄마가 자신을 전혀 보호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슬프고 무서울 거예요. 아이가 자라면 엄마에게 엄청난 분노를 느낄 수도 있어요.
남편에게 당당하게 말하세요. 아들을 편애하는 건 옳지 않다고, 남편의 행동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얘기하세요. 아이들을 차별하는 건 정서적 학대입니다. 애원하거나 흥분하지 말고 차분하게 말하세요. 그 얘길 꺼내면 이혼으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버려야 해요. 오히려 남편이 달라지지 않으면 이혼도 고려하겠다고 강하게 얘기하세요. 협박하라는 게 아니라, 남편과 힘의 내적 균형을 찾으라는 얘기입니다.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갇혀서 관계를 바로잡지 않으면 실제로 버려지는 사람이 될 가능성이 커집니다.
얘기하는 도중에 남편이 아영씨에게 물리력을 행사할 수도 있을 테지요. 하지만 자신을 위해 용감하게 할 말을 하는 엄마를 보면서 딸 아이는 아영씨를 진정한 보호자이자 엄마라고 믿게 될 겁니다. 당장 용기가 없다면 전문가에게 치료를 받아 힘을 기르세요. 그래서 남편에게 꼭 말하고 행동하세요. 딸에게도 미리 말해 주세요. ‘아빠는 너에게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하고 있어. 엄마가 잘 알고 있고, 그러지 말라고 꼭 얘기할 거야. 사랑하는 엄마를 믿어줘’라고요.
아영씨, 아영씨는 누구에게도 버림받지 않아요. 사람은 소중하고 존귀한 존재라서 누구든, 어떤 상황에서든 버려질 수 없어요. 수없이 버림받았다고 느끼며 살아 온 지난 인생이 절대로 아영씨 잘못이 아니라는 걸 기억하세요.”
취재ㆍ정리=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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