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곳곳의 민원인 첫 대면 때
엄마ㆍ아빠 등 4촌 이내 가족 삼아
주먹으로 맞는 일은 다반사
민원인 칼에 찔릴 뻔 하기도
“한 많은 사람에 마음으로 다가가
법ㆍ시스템 이해하도록 도와줘”
“작은엄마, 지금 집이야? 내가 어제 구청 가지 말라고 했잖아요.”
세종시 국민권익위원회 9층 한 편 5평 남짓 작은 사무실. 출근 시간인 오전 8시50분쯤 사무실 구석에서 이용범(51)ㆍ신희석(43) 조사관이 통화하는 소리가 복도까지 울린다. 조사관들에게 ‘작은엄마’는 밀양에 사는 민원인 장모(80)씨이고 ‘작은아빠’는 인천 사는 민원인 신모(75)씨다. 이 조사관이 20분여 전화 말미에 힘줘 말한다. “오늘은 구청 가지 마 엄마. 내가 곧 갈 테니까, 나랑 얘기해. 나밖에 없지?”
대한민국 구석구석 엄마, 아빠들이 가득한 권익위 고충처리국 고충민원특별팀 조사관들은 일반 관공서에서 보는 평범한 민원인을 상대하지 않는다.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지만, 특별민원인은 상상을 초월한다. 하루에 150번씩 10년 동안 2만번 넘게 같은 민원을 제기하는 사람부터 새벽에 매일 전화해 고함을 지르거나, 가스통 들고 가 불 질러 버린다고 위협하는 사람까지. 정부 부처ㆍ수사기관ㆍ청와대 등을 모두 거친 민원들이 마지막에 오는 곳이 고충민원특별팀이다. 팀장과 조사관 2명이 매일 140여명의 민원인들과 씨름한다. 해결해야 할 특별민원인이 약 30명, 나머지는 해결 후 지속 관리 차원에서 연락하는 이들이다.
전국의 민원인이 ‘형님’ ‘작은엄마’
지난달 27일 만난 이 조사관은 ‘작은엄마’와 통화 후 이야기를 꺼낸다. “처음 만난 날 민원인을 다 4촌 이내 가족으로 만들어요. 제 이종사촌누나가 49년생이신데, 그보다 나이가 많으면 아버지 어머니고 적으면 형님, 누님이라고 불러요.” 이 조사관은 서류철로 가득 찬 3층짜리 캐비닛에서 서류철 하나를 꺼냈다. 임의로 펼친 서류 위에 적힌 숫자는 5,601. 한 민원인이 5,601번째로 제기한 민원이다. 매일 하나씩 민원을 넣어도 자그마치 15년이 걸리는 숫자다. 끝이 아니다. 뒤로 민원 서류 수백 장이 더 있었다.
오전 9시 30분, 권익위 건물을 나서 SUV 차량에 올라탔다. “이거 신 조사관 차예요. 보통은 저랑 신 조사관이랑 여비 2만원으로 버스 타고, 기차 타고 다녀요. 저번에 강원 고성군에 갈 때는 산으로 들어가는 시골길이라 한 6시간 걸렸어요.” 1박 2일 출장도 예사. 고충민원특별팀은 고성에서 포항까지 특별민원인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방문한다.
조사관들이 감수해야 할 것은 고집불통 민원인으로부터 받는 정신적 스트레스뿐만이 아니다. 종종 물리적 위험에도 노출된다. 이 조사관은 2010년 경기 수원시 한 거리에서 감정이 격해진 민원인의 칼에 찔릴 뻔했다. 그는 “형님! 나 찌르면 내 가족 다 먹여 살려야 돼, 알지?”라고 배를 들이밀어 위기를 넘겼다. 주먹으로 맞는 일은 일상 다반사다. 그런데 이 조사관의 말이 의외다. “가족들 만나러 가는 거예요. 어떤 분은 아프고, 어떤 분은 힘들고. 저는 그분들 말 들어주는 의사가 되는 거죠.”
오후 1시, 서울 영등포에 도착한 조사관들이 자기 집에 온 것처럼 허름한 2층 건물에 들어간다. 곽희관(67)씨가 운영하는 카페다. 신 조사관은 곽씨에게 ‘형님이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아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나 곽씨가 “내가 서류를 준비해 놨는데”라며 민원 얘기를 꺼내기 무섭게 이 조사관이 말을 돌린다. “나 오늘은 형수님 만나러 온 거니까, 저기 사무실 좀 가 계세요.”
누가 민원인이고 누가 조사관인지 헷갈릴 정도로 호통을 치며 이 조사관은 천연덕스럽게 곽씨의 아내 성모(62)씨의 어깨를 주무른다. “왜 자꾸 아프고 그래.” 이 조사관의 살가운 말에 성씨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내가 죽어도 못 잊을 거야. 정말 고마워요.” 성씨는 요즘 부쩍 몸이 좋지 않다고 했다. “민원인보다 가족들이 더 힘들어요. 본인이야 민원에만 집중하니까 주위도 안 보이고 잘 몰라요. 가족들은 그 사람 지켜보면서 병들어요. 가족들부터 치유가 필요해요.”
한 많은 사람에 마음으로 다가가
오후 1시 50분, 조사관들은 곽씨가 사무실로 쓰는 카페 맞은편 컨테이너로 들어섰다. 2평 남짓 컨테이너의 절반이 수년 묵은 서류들이었다. 벽면부터 책상 아래, 의자 뒤까지 곽씨가 보냈던 1,000여건의 서류들로 가득하다. 곽씨는 정부민원포털 민원24에 또 한번 민원을 올리려던 참이었다. 곽씨의 하소연은 강도가 세다. 조사관들에게 내용을 설명하며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더니 컨테이너 밖으로 고함소리가 넘친다. 책상도 두드리고 발도 구른다. “이런 답변이 말이 되는 일이야? 전화하면 다른 데로 돌리고, 돌리고! 켕기는 게 있으니까 핑퐁하는 거 아니야.”
곽씨는 법을 잘 아는 민원인이다. 정부 부처와 법원 등으로부터 회신을 받으면 오류를 찾아내 다시 민원을 넣는다. 벌써 7년이 넘었다. “이대로 내면 똑 같은 답변만 돌아올 거야. 민원에서 틀린 부분만 수정해서 다시 보내면 내가 기획재정부에 협조를 구해 볼 테니 형님 민원 그만 넣고 조금만 기다려.” 조사관들이 하는 일은 홍씨의 하소연을 들어주는 한편 민원인이 일상생활에 서서히 복귀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하루 아침에 민원이 종결되면 오히려 민원인이 무력감에 빠지는 일도 생긴다.
조사관들은 모든 분야를 공부해야 한다. 법전부터 의학서적까지 틈나는 대로 읽는다. 민원의 분야가 제한이 없기에 조사관들도 방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이 정도 노력이면 민원인들도 마음이 움직인다. 곽씨는 “조사관들의 도움 덕분에 부동산 민원이 97% 해결됐다”고 말한다. 남은 것은 3%. 그래서 곽씨의 민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특별민원 대부분은 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상태다. 김의환 권익위 고충처리국장은 “해결할 수 있는 일이면 벌써 해 줬겠죠. 그럴 수 없으니 민원인에게 마음으로 다가가 법과 시스템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게 우리 일입니다”라고 말한다. 2011년 7월 김영란 전 대법관이 권익위원장 재직 당시 고충민원특별팀을 만든 취지가 바로 공무원이 놓쳤을 수도 있는 민원인의 억울함을 듣겠다는 것이었다.
오후 5시 30분, 날이 어둑해질 때쯤 조사관들은 세종시에 복귀했다. 다시 사무실로 올라가 전국의 엄마, 아빠들께 밀린 전화를 한다. 민원 해결은 못해도 마음은 어루만져 줄 수 있다.
“특별민원인도 국민의 한 사람입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다들 민원을 시작하게 된 가슴 아픈 사연이 있죠. 응어리진 한만 풀면 따뜻한 사람들이에요.” 애틋한 50세 아들의 마음이다.
세종=박재현 기자 remak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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