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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원 되기 위해 ‘열정호구’ 자처하는 청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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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원 되기 위해 ‘열정호구’ 자처하는 청년들

입력
2017.03.17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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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계속 버티다 보면 당연히 상품기획자(MD)가 될 줄 알았어요”

이상국(30ㆍ가명)씨는 지난해 1월 치열한 경쟁을 뚫고 온라인 유통업체 A사의 신입사원이 됐다. 입사 후 4개월간의 평가를 통과하면 정규직이 된다는 조건이었다. 기쁜 마음으로 4개월을 버텨 정규직이 된 그에게 회사는 또 다른 관문을 제시했다. ‘직무 발령 평가’라는 이름의 8개월짜리 평가였다. 이씨는 너무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극심한 취업난을 생각하며 다시 꾹 참고 일했다. 하지만 도합 1년의 수습기간을 거친 그에게 돌아온 답은 비정규직인 보조 MD로 발령 났다는 소식이었다. 이씨는 “열심히 하면 정규직이 될 거라는 선배들의 말만 믿고 밤낮없이 일했는데 정작 비정규직으로 돌아가니 너무 화가 났다”고 말했다.

‘평가 후 전환’이라는 기업들의 약속에 희망고문을 당하는 청년들이 늘고 있다. 인턴, 교육생 등 소정의 평가과정을 거치는 채용방식이 늘어난 데다, 각 기업들이 내부 사정에 따라 지원자들의 사정과 상관없이 정규직 전환 비율을 낮추거나, 처우가 낮은 수습기간을 늘리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웹툰 '열정호구'.
웹툰 '열정호구'.

지난해 B 보험사의 채용형 인턴 과정에 지원했던 박시하(24ㆍ가명)씨도 이씨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 6개월 간 B사에서 일했던 박씨는 “6개월 동안 실적 압박에 시달리다가 결국 전환되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박씨는 업무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탈모까지 왔다. 박씨는 “상사에게 실적만 잘 채우면 전환된다는 말을 들었다“며 “’정규직 돼야지?’고 말로 스트레스를 줘놓고 정작 정규직 전환은 이뤄지지 않았다”고 하소연했다. 인턴활동 종료 후 박씨는 우울증에 빠져 모든 일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떠났다. 이 일을 계기로 박씨는 “직장생활에 환멸을 느껴 금융권에 취업하겠다는 오랜 꿈을 접고 공무원 준비를 할 예정”이라 말했다.

웹툰 '열정호구'는 '진상컴퍼니'라는 온라인 매체에 시사만화가로 취직한 주인공이 정규직 전환을 빌미로 과도한 업무를 요구당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작가 제공
웹툰 '열정호구'는 '진상컴퍼니'라는 온라인 매체에 시사만화가로 취직한 주인공이 정규직 전환을 빌미로 과도한 업무를 요구당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작가 제공

이씨, 박씨와 같은 경험을 한 청년들이 한 둘이 아니다 보니 이들의 애달픈 삶을 다룬 ‘열정호구’ 라는 웹툰까지 등장했다. ‘호구(이용당하는 사람이라는 비유적인 표현)’처럼 일한다는 자조적인 표현에 열정을 결합한 단어다. 웹툰 속 주인공은 어렵게 비정규직 작가로 취업하지만 상사의 과중한 업무 요구에 시달린다. 인신공격, 불필요한 업무지적은 덤이다. 그러나 다시 취업준비생이 되는 게 두려운 주인공은 차마 회사를 나오지 못한다. 대신 ‘더 노력하면 정규직이 될 것’이라는 일말의 희망만 쫓는 ‘열정호구’가 된다. 웹툰은 ‘초현실주의 웹툰’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현실적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인기를 끌고 있다.

작가 솔뱅이는 “많은 사회초년생들이 자신의 대우가 정당한 것인지 모른 채 착취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문제의식을 느껴 만화를 그렸다”고 말했다.

웹툰 '열정호구' 한 장면. 비정규직인 주인공에게 상사는 인사평가를 들먹이며 심리적 압박을 가한다. 정규직 전환을 꿈꾸는 주인공은 어쩔 수 없이 상사의 요구를 받아들인다.
웹툰 '열정호구' 한 장면. 비정규직인 주인공에게 상사는 인사평가를 들먹이며 심리적 압박을 가한다. 정규직 전환을 꿈꾸는 주인공은 어쩔 수 없이 상사의 요구를 받아들인다.

기업들은 신입 채용 시 전형과정이 바뀌거나 탈락자가 생기는 것은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대졸 신입사원 1명을 채용해 교육하는데 평균 18.3개월, 약 6,000만원의 비용이 드는 현실(한국경영자총협회 2013년 조사)에서 기업 역시 더 신중하게 평가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씨가 근무했던 A사 관계자는 “다방면의 실무평가가 필요했기 때문에 구직자들과의 합의 하에 평가과정을 만들었다”며 “회사는 공정하게 평가하려 최선을 다했지만 구직자 입장에선 세심함이 부족할 수 있다는 점에 공감한다”고 답했다.

사기업의 채용은 기업 내부의 일이기 때문에 법적으로 이를 규제할 방법은 없다. 그러나 기업과 구직자간의 신뢰를 쌓기 위해서라도 채용과정의 투명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최강연 노무사는 “청년 근로자는 ‘구직활동 포기’라는 큰 기회비용을 감수하면서 6개월에서 1년간의 인턴ㆍ수습 과정을 거친다” 며 “원칙적으로 기업 경영자가 구직자에게 모든 인사과정을 설명할 의무는 없지만 평가 항목이나 근무 환경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지해 구직자들이 ‘희망고문’을 당하지 않고 더 명확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김빛나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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