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역으로 가주세요.”
‘불금’(불타는 금요일)이 절정으로 치솟는 밤10시30분. 택시 잡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시간이지만 사무실을 빠져 나온 직장인 전모(30)씨는 과감하게 모범 택시에 올라탄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1,300원이면 충분한 거리지만 전씨는 기꺼이 10배 이상 지불하기로 했다. 행선지를 밝힌 뒤 그대로 뒷좌석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는다. 전씨는 “일주일간의 피로로 ‘녹다운’된 금요일만이라도 나에게 ‘택시 귀가’를 선물하지 않으면 도저히 울화를 잠재울 수가 없다”고 말했다.
X발비용은 최악의 상황과 만났을 때 더욱 진가를 발휘한다. 소비자들은 지불 행위에 앞서 소비가 가져다 줄 쾌락과 효용을 따져 의사 결정을 내린다. X발비용을 쓰기 직전의 상황이 분통 터지고 진이 빠질수록 그 효과는 배가 된다는 얘기다. X발비용이 노동과 관계가 깊은 것도 이 때문이다. 전씨처럼 ‘회사에서 이렇게 고생을 하는데 이 정도도 못 쓰나’라는 자기위안과 합리화는 유독 출퇴근길에 소비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공기업에 다니는 윤모(29)씨는 출근길에 꼭 사기충전을 위해 프랜차이즈 카페에 들러 4,600원짜리 카페 라떼를 사 마신다. 윤씨는 “사무실에 커피머신이 있어 공짜로 커피를 마실 수 있지만 카페 라떼 한 잔은 출근 직전 내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강조했다.
길고 고된 노동 시간도 X발비용을 부추기는 요소다. 며칠 연차를 내고 훌쩍 떠날 여유도, ‘칼퇴’ 후 집에서 조용히 취미 생활을 영위할 시간도 없다면 상황을 진정시킬 수 있는 선택지는 극약처방에 가까운 X발비용밖에 없다.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X발비용은 돈은 있지만 시간이 없는 요즘 젊은 세대의 새로운 소비 풍조”라며 “차라리 친구를 만나 회포를 풀면 심리 치료 효과가 더 크겠지만 긴 노동시간은 이마저도 허락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전 교수는 “ ‘내가 왜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지’ 하는 상황을 참을 수 없게 되자 직장인들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나름대로 사치를 즐기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느긋한 여유와 풍요로운 휴식을 위해 쓰는 돈이 ‘코스 요리’에 가깝다면 X발비용은 당장에 허기진 배를 달래는 ‘인스턴트 식품’과 같다는 설명이다. 이택광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X발비용을 사회적 비용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신자유주의의 특징으로 진단한다. 이 교수는 “X발비용은 결국 노동의 문제를 개인의 능력 문제로 떠넘겨 나타나는 증상으로 소비는 절대 해결책이 될 수 없다”며 “8시간 근무보장, 복지제도 확대 등 다양한 대책은 이미 나와있지만 이를 실행할 의지와 사회적 합의가 부족한 것”이라고 꼬집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X발비용이 단기간에 스트레스를 진정시키는 데는 효과가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못 된다고 인정한다. 돈을 쓰는 당시에만 일시적 만족감을 가져다 줄 뿐 날아드는 청구서에 후회만 더 커진다는 얘기다. 최근 이직 준비로 마음고생을 한 직장인 신모(29)씨는 기분 전환을 위해 재즈 라이브 카페에서 20만원이 넘는 와인을 다 마시고 돌아왔다. 그는 “당시엔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도저히 액수를 따질 정신이 없었다”며 “다음 날 숙취보다 영수증에 찍힌 가격 때문에 속이 얼마나 쓰렸는지 모른다”고 토로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책을 구매한다는 김모(27)씨는 “이달 만 무려 15권의 책을 사들였는데 읽는 속도가 사는 속도를 못 따라가니 쌓여있는 책을 보면 짜증만 는다”며 눈살을 찌푸렸다.
전문가들은 적당한 소비 활동으로 삶의 활력을 찾는 것도 좋지만 지나친 낭비는 경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지출한 비용에 대해 합리화하고 가볍게 넘어가면 괜찮지만 과소비와 충동구매가 반복되면 외려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며 “소비 외에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자기만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권재희 기자 ludens@hankoookilbo.com 이현주 기자 mem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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