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 도청ㆍ고용통계 조작설…
결국 아무런 근거도 제시 못해
트럼프 돕는 참모진 책임론도
美 국가신뢰도까지 추락 우려
이쯤 되면 병적 수준이다. 미국 워싱턴 정가를 들쑤셔 놓은 ‘도청 의혹’ 파문이 결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가벼운 입이 초래한 또 한 번의 막말 참사로 끝나는 분위기다. 잠잠할 만하면 터져 나오는 트럼프 대통령의 핵폭탄급 거짓말에 미 정치권의 분열은 물론, 국가 신뢰도 추락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숀 스파이서 백악관 대변인은 13일(현지시간) 정례브리핑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사용한 ‘도청(wiretaps)’이란 단어는 통화 내용을 몰래 엿듣는 사전적 의미가 아니라 광범위한 감시나 사찰 활동을 의미한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4일 트위터에 “끔찍하다! 오바마가 (대선) 승리 직전 트럼프타워에서 내 전화를 도청한 것을 알았다”며 도청 의혹을 제기한 트럼프의 주장이 사실상 실체가 없다는 점을 열흘 만에 인정한 것이다. 트럼프는 당시 “이건 닉슨의 워터게이트 사건” “(오바마는) 나쁘고 역겨운 사람” 등 폭풍 트윗을 쏟아내며 버락 오바마 전 정부를 겨냥해 저주에 가까운 막말을 퍼부었다.
백악관이 꼬리를 내린 것은 도청을 입증할 근거를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날은 마침 도청 파문이 불거진 이후 미 하원 정보위원회가 법무부에 관련 증거 제출을 요구한 마감 시한. CNN은 그러나 “법무부가 별다른 증거를 준비하지 못해 제출 기한을 연장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전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최악의 스캔들로 비화할지 모를 도청 의혹에 무대응으로 일관한 사이 미 정치권은 쑥대밭이 됐다. 민주당은 연일 “근거를 대라”고 트럼프를 몰아붙였고, 공화당 내에서도 “의혹을 철회하든지 관련 정보를 내놓으라(존 매케인 상원의원)”는 비난이 빗발쳤다.
언론들은 기가 차다는 반응이다. 이날 브리핑에서는 도청 의혹과 함께 트럼프가 “오바마 정부의 수치는 거짓”이라며 매섭게 공격한 고용통계도 도마에 올랐다. 스파이서 대변인은 “(해당 발언은) 노동통계국(BLS)의 보고서가 아닌 의회예산국(CBO) 수치가 정확하지 않다는 의미”라고 해명했다. 이에 한 기자가 “대통령의 주장은 모두 진실이라고 믿느냐”고 질문했고, 스파이서가 “권위를 갖는 대통령의 말은 당연히 진실이라고 믿는다”고 답하자 취재진 사이에서는 야유가 터져 나왔다.
트럼프의 거짓말 퍼레이드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취임 당일부터 “100만~150만명의 사상 최대 인원이 취임식에 참석했다”고 하더니 “대선에서 300만~500만명이 부정투표를 해 힐러리 클린턴 후보가 전체 득표수에서 앞섰다”는 주장도 내놨다. 물론 근거는 전혀 없었다. 오죽했으면 미 정치전문 온라인매체 폴리티팩트가 2015년 트럼프의 발언을 ‘올해의 거짓말’로 선정했을 정도다. 매체는 대선 유세 당시 트럼프 발언의 70%가 ‘과장’ 이상의 거짓말에 해당한다고 분석했다.
미 워싱턴포스트(WP)는 이런 트럼프를 제어하기는커녕 한 술 더 뜨는 참모진의 책임이 더 크다고 비판했다. 켈리엔 콘웨이 백악관 선임고문은 언론 인터뷰에서 “도청 의혹의 증거는 없다”면서도 “전자레인지도 (감시 도구인) 카메라로 변할 수 있다”는 황당한 변명까지 내놓았다. WP는 “예외적 주장이 지지층의 믿음을 강화하는 데 효과적인 정치 도구는 될지 몰라도 유용한 정책 수단은 아니다”고 꼬집었다.
트럼프의 거짓말이 국익에 영향을 미치는 현실적 위험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영국 일간 가디언의 칼럼니스트인 리처드 울프는 “대통령의 권한이 뒷받침된 트럼프의 거짓 발언은 이제 웃고 넘기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며 “정통성에 대한 트럼프의 두려움이 커질수록 거짓말도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김이삭 기자 hir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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