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인용 승복 87%, 기각 승복 48%

“인용ㆍ기각은 승패 문제 아니다”
전문가들 성숙한 민주주의 제언
세월호 실종자 수색 작업이 한창이던 2014년 5월 13일 청와대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기 위해 자리로 향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오른쪽 입가에 피멍 자국이 선명하다. 세월호 유족 면담을 3일 앞둔 날이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심판의 날이 밝았다. 헌법재판소는 10일 오전 11시 서울 종로구 재동 헌재 대심판정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 결정을 선고한다. 헌재 재판관 8인 중 6인 이상이 인용을 결정할 시 박 대통령은 즉시 파면이다. 불소추 특권은 소멸한다. 직권남용, 강요, 공무상 비밀누설, 뇌물수수 혐의로 직접 수사를 받는다. 재판관 3인 이상이 기각 또는 각하를 택하면 박 대통령은 직무에 복귀한다. 검찰과 경찰, 국가정보원을 포함한 행정부를 다시 총지휘한다.

갈림길 앞에 선 민심의 표정은 복잡하다. 한국일보와 오피니언라이브가 6~7일 전국 성인 1,00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긴급 여론조사에서 탄핵 기각 시 ‘승복하지 않겠다’는 응답이 절반에 육박(47.7%)했다. ‘결과를 인정하고 승복하겠다’는 응답(47.8%)과 비등했다. 최근 탄핵 반대 측이 과격한 언동을 내놓고 있지만, 탄핵 인용 시 불복하겠다는 응답은 10.1%(승복 87.2%)로 제한적이어서 정작 민심의 반발과 정국 혼동은 탄핵 기각 시 훨씬 클 것으로 예상된다.

탄핵 찬성 여론이 77.7%로 반대(19.9%)를 압도하는 상황에서 탄핵 기각의 여파가 더 클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헌재의 결정이 본인의 탄핵 찬반 의견과 다를 경우 ‘잘못된 결정이므로 집회에 참석해 항의하는 등 불복의사를 표출할 것’이라는 응답은 52.1%였다. ‘헌재 결정을 존중해야 하므로 불만족스럽더라도 항의를 자제할 것’이라는 응답은 44%였다. 특히 탄핵 찬성 집단의 불복의사가 59%로 탄핵 반대 집단(31%)의 두 배였다. 최고법원인 헌재 결정은 불복해 재심을 요구할 수 없는 최종심인데도, 민심은 탄핵 기각을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승복은 선택이 아닌 의무의 문제라고 강조한다. 이정희 한국외대 정치학과 교수는 "인용과 기각은 승패의 문제가 아니"라며 "대통령에서부터 국민들까지 침착하게 헌재 결정에 승복하고, 이 심판으로부터 배울 점을 찾는 것이 민주주의와 법치를 지키는 길"이라고 말했다. 헌재의 결정은 한국 사회를 또 다른 시험대에 오르게 한다. 승복할 것인가, 아닌가.

예상했던 결과에 환호하기는 쉽지만, 기대를 저버린 결과라면 받아들이기 고통스럽다. 여론조사 결과는 특히 탄핵 기각에 납득은커녕 분노할 민심의 향배를 드러낸다. 이 경우 촛불민심은 국회의 탄핵소추안 발의와 가결을 촛불집회의 힘으로 끌어냈다는 성취감을 잃고, 사법부에 대한 배신감에 치를 떨지도 모른다.

권력에 예속된 형식상의 법치에 저항하는 것이 곧 정의였던 군사독재정권을 경험한 탓에 불복을 다소 가볍게 여기는 정서도 있다. 이정희 교수는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정치ㆍ사법체제의 역사가 짧다 보니, 법적 절차가 주로 저항의 대상이었다. 늘 승복하는 게 익숙하진 않은 과도기”라며 “민주화는 이뤘지만 진정한 민주사회의 풍토를 아직 가져보지 못한 영향”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촛불집회를 경험한 시민이라면, 이제 독립적 사법부가 내린 결정을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성숙한 민주주의를 향해 한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 어떠냐고 전문가들은 제언한다. 임지봉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당사자인 박 대통령이 결과에 승복해야 하듯, 국회도 국민도 헌법이 부여한 헌재의 권한을 받아들일 자세가 돼 있어야 한다”며 “어느 쪽이든 불복을 합리화하는 건 법치주의에 반하고, 삼권분립에 위배되고, 민주주의의 큰 틀을 훼손하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애초에 박 대통령이 탄핵심판대에 오른 이유가 바로 ‘헌법과 법치를 유린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를 논하는 식의 초법적 불복이나 폭력적 항의가 아니더라도 헌법 질서 안에서 정치적 의견과 권리를 주장할 길이 있다고 학계는 지적한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는 “개인이 승복하고 불복하고를 떠나 민주주의 국가에서 헌재의 판결은 당연히 유효한 것”이라며 “다만 우리에게는 그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얼마든지 유효하고 적법한 틀 안에서 각자 정치적 의견을 펼칠 자유가 있다”고 말했다. 합법적 집회, 판결 비평, 헌재 시스템에 대한 제도개선 요구, 개헌 논의 등 합법적 대응책이 존재하는데다 문제해결에도 이 편이 더 유용하다는 얘기다. 한 교수는 “이 와중에 궐기하자, ‘깽판’을 치자는 식의 대응은 유효하지 않다”며 “그런 의미에서 이번 선고는 민주적 룰을 지킬 생각도 없이 선동에 의해 움직이는 엉터리 보수가 몰락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역시 “사법판단을 불복, 부정하겠다는 생각은 헌정질서, 법치 자체를 부정하는 일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기각 시 촛불집회 측은 박 대통령의 자진퇴진을 요구하고 그간 목놓아 요구한 ‘구시대 적폐의 청산’의 과제를 지향할 수 있으며 이는 ‘불복’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라며 “반대로 인용 시 박근혜대통령탄핵기각을위한국민총궐기운동본부(탄기국) 측은 스스로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단지 박 대통령의 복직인지, 헌정질서를 바로잡는 것인지 명확히 자문해 주장을 내놔야 한다”고 지적했다.

당리당략을 떠나 혼란을 막을 정치권의 역할도 중요하다. 한상희 교수는 “어느 쪽이든 결정에 뒤따를 혼란을 풀어나가는 것이 국회의 중요한 역할인데, 대선이라는 목표에 경도되거나 선명성 경쟁만을 펼쳐선 안 된다”고 했다. 이정희 교수는 “대통령과 정치지도자들부터 승복하는 자세를 보여야 하며 인용과 기각을 승패로 여기기보다 선고 후의 후속과제, 즉 여러 적폐 해소를 위한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크고 작은 혼란을 끊어낼 열쇠는 결국 당사자인 박 대통령에게 있다. 노동일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탄핵이 인용됐는데도 박 대통령이 억울함만 호소한다면 보수단체의 폭력집회에 기름을 끼얹는 꼴이 될 것”이라며 “대통령이 ‘헌재의 판단을 존중하며, 결과에 승복한다’고 직접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또 “만약 기각이 되더라도 박 대통령이 직접 ‘억울한 부분은 소명했지만 이 막중한 혼란을 초래한 책임을 통감하고 즉시 하야하겠다’는 태도를 보이길 바란다”고 말했다.

“나는 판결에 결코 동의하지 않지만 그 판결을 받아들인다. 오늘 밤 우리 민주주의의 역량 강화를 위해 나는 양보를 선언한다.” 2000년 부정개표 논란에 휩싸인 미 대선 당시 앨 고어 민주당 후보는 재검표를 중지하라는 연방대법원의 판결을 받아들이고 패배에 승복함으로써 미국의 민주주의를 구해냈다. 최순실 게이트는 우리 사회의 추악한 치부였지만, 합법적 절차에 따라 대통령을 탄핵하려 한 국민의 요구는 성숙한 정치의식을 증명해 보였다. 이제 우리에겐 가장 어려운 과제가 남아있다. 헌재가 내릴 결정에 승복할 준비는 되어 있는가.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박재현 기자 remake@hankookilbo.com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해 11월29일 청와대 브리핑룸에서 3차 대국민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달 11월 4일 청와대에서 대국민 담화를 발표한 뒤 퇴장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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