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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도 한 때는 ‘아름다운 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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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도 한 때는 ‘아름다운 패자’

입력
2017.03.10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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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 고어, 2000년 43대 美대선

논란 많던 선거결과 승복하며

“결과 받아들이는 게 화합정신”

작년 말 美대선 힐러리 클린턴도

“트럼프, 성공한 대통령이 되길”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 한국일보 자료사진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 한국일보 자료사진

“지지자들이 느끼는 것처럼 저도 실망스럽습니다. 하지만 애국심으로 실망감을 극복해야 할 것입니다. (…) 위기가 닥치면 함께 힘을 모았듯, 이제 대열을 정비해야 합니다. 지금은 분열보다는 화합이 더 절실함을 깨달아야 할 시점입니다.” (2000년 앨 고어 승복연설 중)

선거, 심판, 선고 등의 결과에 승복하는 일은 민주주의와 법치의 근간을 이룬다. 법원 안팎에서 모두가 “법원의 판단을 존중한다”는 다짐을 되뇌는 것은 항의할 명분이 부족해서만은 아니다. 결과가 다소 문제적이라고 생각될 때조차 차근히 이 실수에서 배울 점을 찾는 것이 민주주의 시스템 자체를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일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와 법치를 지키기 위한 승복으로 갈채를 받은 대표적 인물은 앨 고어다. 갈등과 분열을 막기 위한 그의 승복연설은 미국 민주주의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반전의 반전을 거듭한 2000년 43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였다. 민주당 후보 앨 고어와 공화당 후보 조지 부시가 팽팽히 맞서고 있었다.

당시 개표 결과 득표수는 고어가 부시를 54만 표 앞섰지만, 선거인단 수에서 271대 266대로 부시가 앞서면서 부시의 당선이 확실시됐다. 그런데 막판 부시 승리의 관건이 된 플로리다(선거인단 25명)의 재검표 과정에서 문제가 터졌다. 고어의 득표 중 무효 처리 된 표가 상당수 발견된 것이다. 투표 용지에 구멍을 뚫어 유권자가 의사를 표시했지만, 검표기가 읽어내지 못한 경우 등이었다. 플로리다 선거법에 따르면 유효처리 됐어야 할 표였다. 플로리다에서 부시와 고어의 표차는 단 537표였다.

“재검표는 불가하다”는 주장과 “플로리다에서 수작업 재검표가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이 맞섰고, 여론도 둘로 갈렸다. 소송이 이어졌고, 플로리다주 대법원은 무효표에 대한 재검표를 승인했지만, 연방대법원이 “플로리다주의 재검표는 위헌”이라며 사건을 파기 환송해 부시의 손을 들어줬다. 이 결정에 당시 민주당 중진들조차 “아직 승복할 때가 아니다” “중요 원칙을 놓고 싸우는 중”이라는 불복의지를 내비쳤다.

하지만 고어는 결국 연방대법원 판결 다음 날, TV연설을 통해 ‘대통령 부시’에게 힘을 실어줬다. 그는 “결승선에 도달하기 전에 무수한 논쟁이 이어지지만 일단 결과가 정해지면 승자나 패자나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화합의 정신임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고 입을 뗐다. 그의 명연설은 미국 민주주의의 정신으로 오래 회자됐다. “부시 당선자가 짊어질 무거운 짐을 덜어주는 데 조금도 망설이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나와 함께 했던 지지자들에게 이제는 새 대통령 뒤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기를 당부 드립니다. 그것이 미국입니다.”

지난해 말, 미국 대선 결과를 놓고 비통에 빠진 민주당 지지자들을 달랬던 것도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의 감동적 승복 연설이었다. 스스로도 충격이 컸던 듯 10시간여 뒤에야 나온 연설이었지만, 뉴요커 호텔 연단에 선 그는 “우리는 결과에 승복하고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며 “모든 미국인을 위해 트럼프가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여러분이 느끼는 실망감을 나도 똑같이 느끼며 고통스럽다”면서도 “지금 영상을 보고 있는 소녀들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충분히 모든 기회와 행운을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절대 의심하지 말라”고 말해 박수를 받았다.

탄핵심판대에 오른 박근혜 대통령도 한 때는 아름다운 패자로 불렸다. 경선불복의 역사로 점철된 한국 정당사에 보기 드문 승복의 역사를 남겼기 때문이다. 2007년 8월 20일 서울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열린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이명박 후보가 차기 대선후보로 당선되자, 근소한 표차로 패배한 박근혜 후보는 연단에 올라 이렇게 말했다. “저 박근혜는 경선 결과에 깨끗하게 승복합니다. 정치를 하면서 늘 여러분의 과분한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그 사랑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경선 과정의 모든 일을 다 잊고, 하루에 못 잊는다면 며칠 몇 날이 걸려서라도 잊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열정이 채워진 마음으로 돌아와 저와 함께 당 화합을 위해 노력합시다." 백색 재킷 차림이었다.

더 앞서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이 한참이던 2004년 4월 16일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여의도 천막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탄핵 문제는 헌재에 맡겨야 한다고 정치권과 국민을 향해 호소했다. “끝까지 차분하게 기다리고 어떤 결과가 나와도 승복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불복을 운운하는 대통령 대리인단과 박 대통령 지지단체의 태도에 우려와 한탄이 나오는 이유다.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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