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전히 올리버 색스 탓입니다. ‘의사+질병’ 조합의 책들이 쏟아진 것은. 이 조합이 눈길을 끄는 건 ‘삶의 의미’를 묻기 때문입니다. ‘아픔에 대하여’는 그렇게 쏟아지는 책 가운데 손에 쥘만한 책입니다. 이전 책들이 ‘개인적 성찰’ 쪽에 치우친 감이 있다면 이 책은 좀 더 폭넓은 사회적 맥락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더 가치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1906년생인 헤르베르트 플뤼게는 신경과, 내과 의사입니다. 시립병원장 등을 거쳐 1952년 이후 17년간 하이델베르크대 병원장을 지냈습니다. 연도를 보면 짐작할 수 있듯, 독일 전역이 나치즘의 광기에 이어 패전의 수치와 자괴감에 푹 빠져 있을 때입니다. “전쟁, 아버지가 없는 가정, 폭탄이 떨어지는 밤, 제국 노동봉사단, 방공포대 지원 근무, 히틀러 유겐트, 암거래 폐허와 온갖 불법의 현장”을 겪은 젊은 세대들은 이전 시대 모든 것을 부정했고, 부모 세대는 딱히 할 말 없어 먹먹하던 때였습니다. 모두가 모두에 대해, 뭔가를 끙끙 앓고 있던 시대였습니다.
플뤼게는 이 ‘끙끙 앓음’을 풀어나갈 키워드로 파스칼의 ‘팡세’에 나오는 ‘앙뉘’(Ennui)를 끌어들입니다. 흔히 ‘지루함’으로 번역되는 앙뉘란 ‘아무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우울함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뭔가 꽉 막힌, 이번 매듭이 풀린다 한들 그 다음이 더 걱정인, 그렇고 그런 교착 상태 앞에서 망연자실해 있는 모습입니다.
이럴 때 사람이라면 누구나 뭔가 돌파구가 있지 않을까, 라고 희망하게 됩니다. 플뤼게는 이런 희망을 ‘세속적 희망’이라 부릅니다. 세속적 희망은 “획득을 기대”하는 심리이기 때문에 언제나 “정말 이루어질까라는 의심과 불안”을 낳습니다. 세속적 희망은 “항상 세계를, 심지어 대개 그 본질상 우연이자 우발일 수 밖에 없는 소원의 세계를 목표”로 하기에 당연하게도 “허무한 것, 충족될 수 없는 것”이자 그 끝은 어쩔 수 없이 “환멸”입니다.
저자는 대신 ‘근원적 희망’을 제시합니다. 근원적 희망은 “세속적 희망이 깨끗이 무너졌을 때 가장 확실하게 경험”하는 것입니다. “환멸에서, 세속의 허망한 희망이 완전히 무너져버려 맛보는 쓰라린 환멸에서 신비롭게도 다른 희망이 생겨”납니다. 그렇기에 세속적 희망의 특징이 “초조한 기다림”이라면, 근원적 희망의 특징은 “인내심”입니다. 자살하는 젊은이와 불치병 환자에 대한 플뤼게의 임상관찰 결과입니다.
그렇기에 플뤼게는 희망이란, 근원적 희망이란 “심리학이 아니라 인간학의 영역”이라 선언합니다. 19세기 영국 화가 조지 프레드릭 와츠가 저토록 절망적인 그림을 그려놓고는 ‘희망’이란 제목을 붙인 이유이자,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저 그림을 그토록 좋아했다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를 둘러싼 이 모든 상황이 환멸적인가요. 그럴 때 희망은 피어날 겁니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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