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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즐거운 무법자들

입력
2017.03.09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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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삼아 말하자면 금요일인 10일자 지면에 실릴 글을 쓰는 심사가 썩 흔쾌하지는 않다. 그럴 리도 없겠지만 천하의 명문을 쓴다 한들 뉘라 눈길을 줄 텐가. 온 나라의 눈과 귀가 헌법재판소가 내리는 판결에 쏠릴 것이고, 나 또한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터이니 말이다. 마치 꿈을 꾸듯, 혹은 폭풍 속을 뚫고 나온 듯한 지난 몇 달이 이제야 한 매듭을 짓게 되는 시점이다. 나 역시 보지 않던 종편 채널에 몇 시간씩 넋을 빼앗기기도 하고, 어쩔 수 없이 분노와 한숨으로 술잔을 비우기도 한 날들이었다.

국정 붕괴 사태가 불거진 처음부터,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머릿속에서 자꾸 맴도는 소설이 하나 있었다. 보르헤스의 ‘불한당들의 세계사’가 그것이었다. 내게는 난해하기만 한 그의 소설들 중에 그래도 쉽게 읽히고 재미도 있는 단편소설집인데 편편이 상상을 초월하는 극악무도한 악당들이 등장한다. 잔인한 것은 기본이고 인간이 이성으로 쌓아 올린 이 사회의 모든 것을 거의 해탈에 이른 무심함으로 조롱하는 수준에 이른 악당들이다.

1935년에 나온 이 책에 비견될 만한 미학은 쿠엔틴 타란티노가 감독한 일련의 영화들이 아닐까 싶다. 저수지의 개들로 시작하여 펄프 픽션, 킬빌 같은 제목이 떠오른다. 세계사 속에 명멸했던 불한당들이 아니라 불한당들의 세계사로 제목을 붙인 데서 엿볼 수 있듯이 이 세상 속에는 드러나지 않는, 면면한 악당들의 역사가 엄연한 흐름으로 존재한다고나 할까.

나는 그 소설을 읽으며 우리 역사 속에는 왜 그토록 뛰어난 악당들이 없었는지, 그러니까 자신이 악당임도 잊은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른 악당이 왜 없었는지 좀 아쉬운 심정이었다. 보르헤스의 악당에 뒤지지 않게 근사하게 소설로 그려낼 만한 악당은 찾기 어려웠다. 아무리 악인이라도 양심과 이성, 혹은 회개라는 희미한 끈을 아주 놓아버리는 경우는 쉽게 만날 수 없었다. 결국 우리 문학에서 악인을 다룬 소설로 보르헤스의 그것과 어깨를 나란히 할 작품은 나오지 않을 거라는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조금은 씁쓸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번 사태를 통해 나는 그 가능성을 발견하였다. 불한당과는 조금 의미도 다르고 남이 먼저 썼으므로 ‘무법자’라는 호칭이 어떨까 싶은 숱한 등장인물들이 갑자기 강호에 출몰하였던 것이다. 기실 법을 잘 지키고, 심지어 법이 없어도 좋을 정도의 사람들은 소설가가 즐겨 선택할 인물은 아니다. 그러니 나는 분노와 한숨 말고 은밀하게 이들의 행장과 언행을 얼마간 반가운 마음으로 지켜보았음을 고백해야겠다. 내가 발견한 몇 가지만으로 이들은 ‘무법자들의 한국사’에 당당히 이름을 올릴 자격이 있다.

첫째, 그들은 법에 대해 독특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으니 오직 그들에게 유리한 법만이 지킬 가치가 있다는 확고한 믿음이었다. 둘째, 남에게 강요할 때는 칼날 같고 자신에게는 수양버들 가지처럼 부드러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셋째는 어떤 불법도 내가 아니라 하매 곧 합법이 된다는 경지, 법 미꾸라지가 아닌 법 조물주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제 그들은 촘촘하게 짜인 그들만의 무법지망(無法之網) 위에서 뛰고 뒹굴며 즐기다가 한 귀퉁이가 찢어져 떨어질 위기에 처했다. 물론 그들은 무리를 모아 태극도(太極道)라 이름 지은 이들이 다시 찢어진 그물을 기워 주리라고 믿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아직 갈 길은 멀어 보인다. 백성들은 얄궂게도 무법자들을 좋아하는 품성 또한 지니고 있다. 법을 어기는 것과 양심에 따르는 일이 하나라고 여겼던 전직이나, 짐이 곧 법이라는 현직 대통령을 뽑은 이도 다름 아닌 이 땅의 백성들이었으니 불한당들의 역사는 면면할 것인가. 두려워라, 머나먼 민주주의의 길이여!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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