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경제학자 빌헬름 뢰프케는 평생 화두 하나를 붙들고 살았다. 바로 “칸트 괴테 베토벤의 나라 독일이 어쩌다 미치광이 히틀러에게 몰표를 몰아주어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재앙을 인류에게 안겨주었는가?”였다. 의문은 곧 이런 재앙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독일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라는 성찰로 이어졌다. 뢰프케가 도달한 결론은 한 사회가 건강하려면 사회적 계층질서 피라미드의 최상층에 소수의 ‘윤리적 귀족’이 존재해야 하며, 무지한 대중들로 인해 세상이 흔들리지 않으려면 진정한 성직자 혹은 지식인과 같은 엘리트가 자기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뢰프케는 두 가지 특이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25세 때 예나대학교의 교수에 임용됨으로써 독일 역사상 최연소 교수가 되었다는 점이고, 두 번째 기록은 나치정권이 해직한 대학교수 리스트 상단에 그의 이름이 위치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나치의 집권 이전부터 장차 나치가 독일에 엄청난 재앙을 불러올 것을 예견하고, 강연과 기고를 통해 격렬한 비판을 가함으로써 히틀러의 미움을 샀다. 마침내 현실화된 나치의 박해를 피해 그는 터키를 거쳐 스위스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뢰프케는 나치체제가 가져온 재앙을 복기하면서 모름지기 건강한 사회에는 윤리적 귀족의 존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가 말하는 윤리적 귀족은 ‘범할 수 없는 규범과 가치를 지키는 공동체의 수호자를 자임하고 또 그것을 몸소 엄격하게 실천하는 소수의 영향력 있는 지도자 그룹’을 의미한다. 윤리적 귀족은 절제된 생활을 위해 헌신하고, 진리와 법을 수호하기 위해 용기 있게 행동하며, 마침내 국가의 양심이 되는 인물이다. 그는 “자유사회의 지속적인 존립여부는 우리 시대가 윤리적 귀족을 얼마나 충분히 창출하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는 자신의 목전의 이해에 눈멀지 않고 중요한 경제정책을 바라볼 수 있는 사업가, 금융인, 노조지도자, 재판관, 언론인과 학자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최순실 사태 이후 광장에 촛불이 켜지고 연이어 태극기 물결이 등장하면서 나라는 의식적으로 두 쪽이 났다. 현대 국가의 가장 큰 책무인 갈등조정은 교과서 속으로 퇴장하고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적절한 대응은커녕 한국은 정부부재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 사드의 중국, 소녀상의 일본, 트럼프의 미국 등 국제문제가 우리를 옥죄고 있으나 정부는 아무 손을 쓰지 못한다. 정치권은 온통 대통령선거에만 집중하는 바람에 민생이라든지 청년 일자리 같은 국내현안도 표류하고 있다. 가위 국난이다.
미증유의 국난을 맞아 우리에게도 윤리적 귀족이 있는지를 자문하게 된다. 존경하는 정치인, 믿고 따를 수 있는 성직자, 올곧은 언론인, 신뢰하는 법조인, 시대정신을 발현하는 지성인이 우리에게 있는가. 지금은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대중이 귀담아듣지 않는다. 그런 판국에 국민이 존경할 만한 인물이 단 한 명도 보이지 않기에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어쩌다 언론이 국가 원로라는 포장으로 전직 고위인사 몇 사람의 의견을 묶어 보도하지만 그들의 말은 국민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어른도 원로도 지도자도 존경할 만한 인물도 없는 사회야말로 비극의 무대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세상에서는 국민이 자포자기하기 쉽고 부박해진다. 광장은 이미 그런 기류를 반영하기 시작했다.
믿고 따를 인물이 없는 우리에게 뢰프케의 윤리적 귀족 처방은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향후 한국사회가 건강성을 유지하려면 우리에게도 윤리적 귀족에 해당하는 다음 세 집단의 정신이 살아있어야 한다. 지식인, 언론인, 종교인이다. 지식인의 책무는 건강한 시대정신을 제시하는 것이다. 언론인은 사회가 썩지 않도록 감시하고 계도하는 것이 기본 책무다. 종교인은 국민들이 저마다 가치 있게 살아가도록 방향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이들이 절제된 생활을 위해 헌신하고, 진리와 법을 수호하기 위해 용기 있게 행동하며, 각자의 영역에서 국가의 양심이라 칭할 만한 인물로 성장한다면, 비로소 국민의 가치관이 바로 서게 되며 그때 가서야 나라가 반듯해질 것이다.
서재경 아름다운서당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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