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실학자 연암 박지원(1737~1805)의 대표 저작인 ‘열하일기(熱河日記)’의 친필 초고본에는 양반 체면에 구애 받지 않고 자유로운 문체를 구사했던 연암의 면모가 반영돼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단국대가 소장 중인 ‘열하일기’ 친필 초고본 9종과 필사본 5종을 정밀 분석한 결과다.
7일 단국대에 따르면 이 대학은 1990년대 연민 이가원(1917~2000) 선생이 기증한 ‘열하일기’ 초고본 14종을 대상으로 한문학자와 국문학자 등 3명의 연구자가 참여해 내용을 분석해 왔다. 3년여에 걸친 ‘열하일기’ 해제 작업을 5년 전에 마치고 이를 바탕으로 연구를 진행해왔다.
‘열하일기’ 분석 작업에 참여한 정재철 단국대 한문교육과 교수는 “친필 초고본과 이후 이본을 비교해 본 결과 초고에 있던 서학(천주교) 관련 내용, 양반 체면에 어긋나는 표현 등이 이후에 많이 삭제됐다. 여성에 대한 성적 묘사나 하인들과 주고받은 농담 등 구어체로 적힌 자유분방한 표현들이 지워졌다”고 설명했다. 예컨대 ‘열하일기’ 친필 초고본 중 하나인 ‘행계잡록’ 속 ‘도강록’ 편을 보면 결혼 행차 중 수레에 탄 젊은 청나라 여인을 묘사하면서 “그중 한 소녀는 자못 자색(姿色)을 지녔다”고 표현했는데 이후에 나온 이본에서는 “옷차림이 우리나라의 당의와 비슷하나 조금 길다”고 바꿨다.
당시 천주교에 대한 탄압과 정조가 강조한 ‘문체반정’ 분위기 속에서 연암이 자기 검열 차원에서 내용을 수정했거나 이후 후손들이 지운 것이라는 분석이다. 정 교수는 “친필 9종도 같은 내용, 같은 제목을 옮겨 쓴 것이지만 일부 표현을 연암이 직접 먹으로 지우거나 수정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열하일기’는 연암이 1780년 조선 정조 때 청나라 건륭제의 고희를 축하하는 사절단에 포함돼 한양을 떠나 열하(현재의 중국 허베이성)를 다녀온 156일간의 여행을 기록한 기행문이다. 단국대는 국내 외에 흩어져 있는 ‘열하일기’ 이본 등 180권의 책을 비교 연구해 원본을 구현하는 정본화 사업을 추진 중이다.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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