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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팬 남’-‘수원 팬 여’ 커플의 슈퍼매치 관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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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팬 남’-‘수원 팬 여’ 커플의 슈퍼매치 관람기

입력
2017.03.07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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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팬인 여자와 서울 팬인 남자가 ‘슈퍼매치’를 관람하러 가는 길.
수원 팬인 여자와 서울 팬인 남자가 ‘슈퍼매치’를 관람하러 가는 길.

여기 평범한 한 커플이 있다. 둘 다 스포츠 마니아다. 작년은 유난히 굵직한 스포츠 이벤트가 많아 커플에게 행복한 한 해였다. 둘은 유로2016을 보며 우승국 내기를 했고, 리우올림픽 때는 밤낮을 바꿔가며 “대한민국”을 외쳤다.

그러나 프로축구 경기장만 가면 어색한 기류가 흐른다. 남자는 FC서울, 여자는 수원 삼성 팬이다. 수원과 서울은 프로축구 K리그 클래식 대표 ‘앙숙’이다. 팬들 사이에도 라이벌 의식이 강하고, 골수 서포터끼리는 적대적이기까지 하다. 한 번은 남자가 작년 시즌 수원의 형편없는 성적을 비꼰 적이 있다. 서울은 지난해 K리그 클래식 우승을 차지한 반면, 수원은 7위로 초라하게 마감했다. 그날 커플은 ‘대판’ 싸웠다.

5일, 커플은 2017 K리그 개막전 ‘슈퍼매치’(서울과 수원의 경기를 부르는 말)를 보기 위해 서울월드컵경기장을 찾았다. 첫 발걸음부터 전운이 감돌았다. 공교롭게 슈퍼매치 다음날인 6일이 사귄 지 꼭 1년 되는 날이다.

관람 아닌 ‘전쟁’에 나서는 기분

스카이펍 테라스석 티켓. 맥주가 무제한 제공되는 건 좋았지만 경기 후반이 되자 테라스는 약간 추웠다.
스카이펍 테라스석 티켓. 맥주가 무제한 제공되는 건 좋았지만 경기 후반이 되자 테라스는 약간 추웠다.

둘은 ‘아사히 스카이펍 테라스석’에 앉기로 약속했다. 그라운드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고 전반에는 생맥주, 후반에는 캔맥주가 무한 제공되는 프리미엄 좌석이다. 입장권은 둘이 합쳐 6만 원으로 비싼 편이지만 1주년을 기념해 기꺼이 지갑을 열었다. 사실 여자는 남자친구를 데리고 수원 원정 응원석에 함께 앉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1주년을 하루 앞두고 남자친구를 차마 ‘적진’에 데려갈 수 없어 특별히 양보했다. 예매는 여자가 했다. 예매를 하기 위해 사이트에 들어가니 ‘상대팀을 응원하는 팬들은 이 구역에 입장할 수 없습니다’라는 팝업이 떴다. 여자는 이 공지를 무시하고 ‘예매확인’ 버튼을 꾹 눌렀다.

둘은 원래 경기 전 여유 있게 도착해 안주를 살 계획이었다. 그러나 택시를 타고나서는 바로 후회했다. 경기장 주변은 인산인해. 교통체증이 심했다. 이날 3만4,376명이 경기장을 찾았다니 그럴 수밖에. 택시는 좀처럼 앞으로 나갈 생각을 안 했고 시간만 속절없이 흘렀다. 신촌에서 출발한 택시는 경기장 주변에서 20분 넘게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둘은 결국 경기장 앞까지 못 가고 근처에서 내려 서둘러 뛰어야 했다. 이럴 거였으면 택시는 뭐 하러 탔지?

수원이 압도한 전반, 남자의 야유가 커지고…

수원이 압도한 전반전 그리고 분위기가 180도 달라진 후반전.
수원이 압도한 전반전 그리고 분위기가 180도 달라진 후반전.

전반은 수원이 지배했다. 전반 9분 일본 J리그에서 이적해 온 김민우가 선제골을 터뜨렸다. 페널티 박스 오른쪽에서 안쪽으로 드리블을 할 듯 하다가 바깥으로 나와 멋진 왼발 슈팅으로 그물을 갈랐다. 신이 난 여자가 남자에게 눈치 없이 ‘오블라디’(어깨동무를 하며 골을 축하하는 수원 서포터즈의 응원)를 강요했다. 남자가 정색하며 뿌리쳤다.

계속 수원이 몰아쳤다. 염기훈과 조나탄이 연이어 서울 골 문을 노렸다. 전반이 끝날 무렵 수원의 코너킥 상황. 수원 주장 염기훈이 다가오자 남자가 거세게 야유를 보냈다. 여자는 남자친구를 약 올리듯 더 크게 “염갓”(염기훈의 별명. 신이라는 뜻)을 외쳤다.

분위기 달라진 후반, 여자를 보호해야 하는 남자

하지만 축구는 90분 경기 아니던가.

후반은 정반대였다. 후반 시작과 함께 투입된 서울 이석현과 주세종이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데얀의 움직임도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여자는 목이 탄 듯 연신 맥주를 들이켰다. 불안한 분위기는 후반 17분 현실이 됐다. 이상호가 오른발을 쭉 뻗어 동점골을 만들었다. 남자친구를 포함해 경기장을 가득 메운 서울 팬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여자는 자신이 마치 외딴섬에 홀로 갇힌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여자를 더 시무룩하게 만든 건 동점골의 주인공이 이상호라는 사실이었다. ‘왜 하필 이상호가….’ 이상호는 작년 말 수원에서 서울로 팀을 옮겼다.

경기 막판 여자가 저도 모르게 수원 응원가를 흥얼댔다. 순간 싸해지는 분위기.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을 제외한 주변은 온통 서울 팬이었다. 남자는 안주를 거의 반 강제로 입에 넣어주며 여자의 입을 막았다.

사이 좋은 무승부

보이는가, 커플의 억지 웃음.
보이는가, 커플의 억지 웃음.

결과는 1-1무승부. 둘은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사진을 남겼다. 여자는 조나탄이 놓친 몇 개의 기회에 땅을 쳤고, 남자는 후반 우세한 분위기에서도 추가골을 못 넣은 게 아쉬웠다. 결국 둘 다 만족스럽지 못한 경기. 자세히 보면 사진 속 둘은 억지웃음을 짓고 있다. 커플은 6월 18일 다음 ‘전쟁’을 예고했다. 장소가 ‘빅버드’(수원월드컵경기장 애칭)로 바뀐다. 이번에는 여자의 ‘안방’이다.

오수정 인턴기자

*오수정 인턴기자는 한국일보 인턴으로 현재 스포츠부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고교 때부터 수원 서포터로 활동한 오수정 인턴기자가 서울 팬인 남자친구와 함께 한 ‘슈퍼매치 관람기’를 재구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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