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삶을 바꾸는 순간이 있습니다. 유명 문화계 인사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들의 인생에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을 남긴 작품 또는 예술인을 소개합니다.
1998년 즈음이니까 벌써 19년 전 얘기다. 당시 나는 휴가 나온 이등병이었다. 군복을 벗자마자 어둠의 경로에 접속했다. 금세 VHS테이프 하나가 손에 들어왔다. 막 세상에 나온 일본 애니메이션 ‘퍼펙트 블루’였다. ‘훗, 덕후에게 이쯤이야 일도 아니지.’
애니메이션 ‘아키라’(1988)의 오토모 가쯔히로 감독이 만든 옴니버스 ‘메모리즈’(1995)를 보고 진작에 기억해둔 이름 하나가 있었다. 첫 에피소드 ‘마그네틱 로즈’(한국에는 ‘그녀의 추억’이라 의역됐다)의 각본가 곤 사토시였다. ‘퍼펙트 블루’는 곤 감독의 첫 번째 장편 애니메이션 연출작이다.
기대가 컸다. 하지만 ‘덕통사고(교통사고처럼 갑작스럽게 어떤 분야의 마니아가 된다는 뜻)’까지 일어날 줄은 몰랐다. 첫 눈에 흠뻑 빠졌다. 한 마디로 ‘충격’이었다. 아이돌 스타에서 배우로 변신한 미마의 자아 분열과 정체성 혼란을 그린 심리 스릴러물인데 시나리오와 연출 모두 흠 잡을 데 없이 탄탄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안타까움이 노도처럼 밀려왔다. ‘천재성을 데뷔작에 모두 쏟아 부었으니 다음 작품은 나오기 힘들겠구나.’ 정말로 그럴 줄 알았다.
그런데 왠걸. 차기작이 나왔다. 예상보다 훨씬 빨리. 심지어 첫 작품만큼 뛰어났고 또한 새로웠다. ‘천년여우’(2001)라는 작품인데(제목의 여우는 야생동물이 아니라 여배우를 뜻한다), 원로 여배우의 숨겨진 사랑 이야기를 액자 식으로 담았다. 곤 감독 특유의 치밀한 구성에 낭만적인 감성까지 실려 있어 퍽 놀랐다. 그날로 난 그의 광팬이 됐다.
2003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본 ‘동경대부’(한국에선 ‘크리스마스에 기적을 만날 확률’이란 제목으로 개봉했다)는 ‘퍼펙트 블루’와 함께 지금도 내 인생 최고의 명작 중 하나로 꼽는다. 곤 감독의 유일한 TV 애니메이션 시리즈인 13부작 ‘망상대리인’(2004)도 ‘당연히’ 섭렵했다. ‘파프리카’(2006)는 전작들에 비해 약간 실망감을 안겼지만 곤 감독의 천부적 재능을 만끽하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대개 애니메이션이라 하면 스토리텔링보다 그림을 강조하곤 하는데 곤 감독은 그 둘 모두 뛰어났다. 질투가 날 정도였다. 그의 시나리오는 현실 세계에 천착했다. 작화도 사실적이었다. 그래서 애니메이션보다 실사가 더 어울린다는 평을 받곤 했다. ‘부산행’(2016)을 만들기 전 ‘돼지의 왕’(2011)과 ‘사이비’(2013)를 내놨을 때 나도 비슷한 질문을 많이 받았다. 그때마다 나는 곤 감독의 답변을 빌려왔다. “애니메이션은 뭐든 할 수 있는 장르인데 왜 판타지만 만드는지 이해가 안 간다.”
1997년부터 단편 애니메이션 작업을 시작했지만 ‘연상호’만의 개성이 드러나기 시작한 건 곤 감독의 작품을 만난 이후인 2003년작 ‘지옥: 두 개의 삶’이다. ‘돼지의 왕’도 ‘퍼펙트 블루’를 본 뒤 군대에서 처음 구상한 작품이다. 애니메이션 감독을 꿈꾸는 내게 주변에선 월트 디즈니 같은 작품이나 유아용 작품을 만들라고 했다. 세계관이 너무 어둡다고도 했다. 곤 감독이 없었다면 아마 흔들렸을 거다. 내 방향성이 맞는지 줄곧 의심했을 테고. 어쩌면 애니메이션 회사에 취업해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선망하는 감독이 나보다 앞서 걸어간 길이 있으니 든든했다. 특히 탄탄한 서사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동질감을 느꼈다.
곤 감독이 영향을 미친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다. 대런 애러노프스키 감독은 ‘블랙 스완’(2010)에서 ‘퍼펙트 블루’를 대놓고 오마주했다. ‘레퀴엠’(2000)에서도 흔적을 여럿 찾을 수 있다. 꿈이 현실에 개입하는 작법을 선보인 ‘파프리카’는 ‘인셉션’(2010)의 원형 같은 작품이다.
곤 감독은 대중적이진 않았다. 일본보다 해외에서 더 유명했다. 내가 곤 감독의 팬이라고 하면 일본 사람들은 도리어 흥미로워했다. ‘언젠가 장편을 만들게 되면 곤 감독을 꼭 만나리라.’ 단편 작업을 하던 시절 꿈이었다.
‘사랑은 단백질’(2008)이라는 단편을 만들었을 때 애니메이션을 연구하는 일본 교수가 취재하러 온 적이 있다. 그 교수가 말했다. “당신과 비슷한 일본 감독이 있는데, 곤 사토시라고 내 친구이기도 하지.” 눈이 번쩍 뜨였다. 그의 광팬이라고 ‘커밍아웃’을 했다. 그 교수는 조만간 만남을 주선하겠다고 약속했다. 가슴이 방망이질 쳤다. 이런 게 ‘성공한 덕후’ 아닌가. 그와 친구가 될 날을 기다리며 ‘덕업일치(관심사가 직업이 되는 것)’에 정진했다.
하지만 억지로 되는 않는 게 사람 인연이다. 2010년 첫 장편인 ‘돼지의 왕’을 한창 작업하던 중에 비보가 날아들었다. ‘곤 감독이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그의 나이 고작 47세였다.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군대에서 뉴스로 접한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죽음 이후 이보다 더한 충격은 없었다. 2년 뒤 ‘돼지의 왕’이 캐나다 몬트리올 판타지아국제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 상의 이름이 ‘사토시 곤 어워드’였다. ‘조금만 더 살아 있었더라면….’
그가 떠난 뒤 나는 조금 쓸쓸해졌다. 이런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사람이 이제 나밖에 안 남았구나 싶어서. 아니다. 아예 없다. 지금은 나도 못 만들고 있으니까.
회사(스튜디오 다다쇼) 사무실에 곤 감독의 작품과 콘티집, 화보, 포스터 등을 모아놨다. 지금도 종종 팬심으로 꺼내본다. 그때마다 치유 받는 느낌이다.
요즘 ‘염력’ 촬영을 한창 준비 중이다. 블랙코미디 장르인데 ‘동경대부’의 톤을 살짝 참고했다. 언젠가 ‘마그네틱 로즈’ 같은 작품도 만들어보고 싶다.
나는 아직 곤 감독을 잘 모르는 관객들이 부럽다. 이제부터 그의 작품을 보면 되니 말이다. 난 이미 너무 많이 봤다. 더 보고 싶은데 볼 게 없다.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하다. 곤 감독을 알아갈 당신들, 정말 행운아다.
연상호 감독(영화 ‘부산행’ ‘돼지의 왕’ ‘사이비’ 등 연출)
※김표향 기자가 연 감독의 구술을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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