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한인 타운에 가보니
“이유없이 취업비자ㆍ여권 대조
활동 위축되고 분위기도 최악”
“마트선 납품 지연시키고
아예 계약 취소 얘기까지”
“안전관련 유의 필요성 제고”
주중대사관은 홈피 공지만
관영매체들 보복 부추기고
장쑤성에선 한국산 차량 파손도
“아직 큰 문제는 없지만 아무래도 불안하네요.”
3일 오후 중국 베이징(北京) 내 한인 밀집지역인 왕징(望京)의 롯데마트에서 만난 한국인 매장 직원의 표정은 내내 어두웠다. 중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ㆍ사드) 보복 조치가 전방위적으로 확대되면서 여기저기서 불안감을 느낄 만한 소식이 들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매장의 한 중국인 고객은 “오늘 같이 오기로 했던 친구가 ‘롯데마트에는 가지 않겠다’고 해서 혼자 왔다”고 했다. 이날 롯데마트의 풍경은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지만 한 매니저급 직원은 “중국 측 일부 파트너들이 납품을 미루거나 아예 공급계약을 취소했다는 얘기가 직원들 사이에서 돌고 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중국의 사드 보복이 현실화하면서 왕징 지역 교민사회에선 걱정과 불안이 커지고 있다. 중국 사회의 특성상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는 관영매체들이 연일 사드 보복 분위기를 부추기는 데다 웨이보(微博ㆍ중국판 트위터)를 통해 장쑤(江蘇)성 치둥(啓東)시 롯데매장 근처에서 현대자동차가 벽돌로 파손된 사건이 전해지는 등 혐한 기류까지 나타나고 있어서다. 이날 겅솽(耿爽)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사드배치 반대 행동과 폭력은 없다”고 했지만 중국 내 한국인들의 불안감은 계속 커지고 있다.
11년째 개인사업을 하고 있는 교민 이모씨는 “중국인들은 사드 문제를 ‘우리 땅에서 돈 벌면서 우리 안보를 위협한다’고 생각한다”며 “중국에 온 이후 지금처럼 분위기가 안 좋은 건 처음”이라고 말했다.
최근 왕징에선 중국의 사드 보복이 한국 정부와 롯데그룹을 넘어 한인사회로까지 확대되는 듯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이틀 새 중국 공안이 한인 사업체와 한인회 등 수십 곳의 한인단체에 불시점검을 나온 것이다. 인터넷 한인커뮤니티에 올라온 글들을 보면 중국 공안은 한국인 직원의 비자를 점검하거나 취업증과 여권을 대조하고 사장의 연락처를 받아가는 등 뚜렷한 목적 없이 방문한 것으로 보인다. 한인회 관계자는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미비사항이 발견되면 꼬투리 잡으려는 것”이라며 “이런 일이 반복되면 실제 조치는 없더라도 활동 자체가 위축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중국의 보복 조치는 특히 중국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교민들의 생업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베이징 시내 왕푸징(王府井)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최모씨는 “이번 주말 예약이 절반 가까이 취소됐다”면서 “예약을 취소한 대부분은 중국인들”이라고 말했다. 베이징의 유명 중의원에서 일하는 한의사 임모씨는 “어제 병원 측에서 갑자기 여권과 취업비자를 점검하겠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고 했다.
우리 기업이나 교민의 신변에 직접적인 위협이 가해진 사례는 없지만 분위기상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의견이 많다. 하지만 든든한 버팀목이 돼줘야 할 주중대사관에선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주중 한국대사관은 이날 홈페이지를 통해 “사드 배치 동향과 관련, 우리 국민의 안전관련 유의 필요성이 제고되고 있다”라며 안전 주의 요청만을 했을 뿐이다. 한 교민은 “대사관과 영사관에 몇 차례 전화했으나 매번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는 얘기 뿐”이라며 “중국이 이렇게 나올 줄 몰랐던 것도 아니고 그 동안 뭐했는지 모르겠다”고 혀를 찼다.
베이징=양정대 특파원 torc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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