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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펑펑 울고 난 후 절감하는 것들

입력
2017.03.03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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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몇 달 오래도록 소식이 닿지 않던 사람들로부터 안부 전화를 받았다. 짐짓 태연한 목소리로 그들은 비슷한 질문을 했다. 별일 없느냐고. 도매상 부도로 살짝 손해를 봤지만, 큰 타격 입지 않고 건강하게 잘 지낸다는 말을 듣고서야 사람들은 안도하면서 걱정스럽던 속내를 털어놓았다.

출판 도매상 부도 소식이 TV를 통해 여러 차례 전해진 바람에 무려 13년 만에 얼굴을 보게 된 친구도 있었다. 오랜만이었지만 “여보세요?” 한마디만으로 그의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무심하기 짝이 없는 그가 어떤 심정으로 내 전화번호를 눌렀을지, 한마디 인사말로 선연하게 전해졌다. 걱정할 것 없다는 나의 호언이 제대로 먹혀 들지 않았는지 그는 며칠 뒤 점심시간에 우리 회사 근처로 찾아왔다. 뜨끈한 매운탕을 함께 먹고 긴 시간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나서야 친구는 염려를 걷어낸 듯 환하게 미소 지으며 돌아갔다.

몇 년 전 여행하다 스치듯 만나 간간이 문자를 주고받던 한 어른도 뉴스 보고 깜짝 놀랐다며 과일을 사 들고 회사를 방문했다. 연세 지긋한 데다 사교 범위까지 넓어 여러 모로 독서보다 재미있는 소일거리가 많을 게 틀림없는 그 어른은, 굳이 깨알 같은 글씨로 써 내려간 두툼한 책들만을 여러 권 골라 구입해 가셨다.

많은 분의 살가운 걱정에도 불구하고 괜찮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작년 이맘때에 정말 힘들었다. 눈에 띄게 달라지는 시장 환경에 대한 불안감에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던 직업에 대한 회의감이 더해졌다. 수시로 찾아 드는 무력감과 대결하듯 눈앞에 놓인 원고를 들여다보았지만, 이놈의 책만 안 만들면 행복할 것 같다는 울화 같은 게 아무 때나 치밀었다. 꾹꾹 누르던 감정은 예기치 않은 순간 아주 남부끄러운 방식으로 한꺼번에 분출됐다. 꽃피는 봄날 오후에, 출간을 앞둔 원고의 표지시안을 검토하는데 눈물이 났다. 질질 흐르는 눈물을 몰래 닦는데 입에서 ‘엉엉’ 소리가 새 나오기 시작했다. 어릴 적 이후, 혼자서라도 소리 내어 운 기억이 없었다. 너무 놀라서 입을 틀어막았지만 소리가 잦아들기는커녕 점점 커졌다. 눈치 빠른 동료들이 자리를 비켜 준 뒤 혼자 그 모양으로 있자니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세상에! 뭔 벼슬을 한다고 쉰 살을 바라보는 나이에 쳐울고 난리를 피우나, 이 추태를 보이고 창피해서 동료들 얼굴을 어찌 볼까…. 그 와중에도 그날이 금요일이라는 사실이 조금은 다행스러웠다.

밤이 깊도록 울다 쉬기를 반복했던 것 같다. 그러다 지쳐서 곯아떨어졌는데, 새벽녘 일어나보니 이상하게도 생각이 명료해졌다. 누군가에 등 떠밀린 인생이 아니었다. 내가 좋아서 선택한 직업이고, 많은 날을 변태적일 만큼 짜릿한 기쁨에 취해 일했다. 불필요한 생각의 곁가지들이 툭툭 잘려 나갔다. 그 새벽 ‘실체가 불분명한 공포에 혼자 휘둘리지 말고 함께 얘기하면서 우리 마음에 드는 책 만들어 가자’던 나이 어린 동료의 문자메시지는 세상 무엇보다 든든한 위로였다. 흐흐, 진작 산발하고 앉아 대성통곡할 걸 그랬나?

요즘 들어 출판계 선후배들을 자주 만난다. 밥 먹고 차 마시며 대화하다 보면, 이 좋은 수다의 맛을 왜 일찍 알지 못했나 싶을 만큼 유쾌해진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10년 가까이 이 바닥을 떠났다가 ‘망해가는 업종에 왜 다시 발을 담그려 하느냐’는 주변 만류를 간신히 뿌리치고 재작년에 복귀했다는 어느 출판사 대표의 ‘자아실현 분투기’를 들을 때는 다 같이 쿡쿡 웃었다. ‘다 자기 좋을 대로 사는 거지 뭐.’

살아가는 동안 누구에게든 몇 번은 찾아오게 될 일련의 일을 겪으며 절감한다. 마음 통하는 동료가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 서로 동정하고 위로받는 일이 비참하기는커녕 어떤 용기와 신뢰를 불러오는지 말이다. 나와 우리 업계 사람들은 이 절대적인 가치를 새삼 확인하며 겨울을 지나고 봄을 맞는 듯하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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