前 헌재 재판관들의 고백
“헌재 결정이 미칠 파장 엄청나
재판관들 소신ㆍ가치관 경합
격론의 싸움터나 다름없어”
큰 사건은 1년 넘게 끌고
간혹 최종 결정 뒤에도 재평의
결정문 초고 보완하기도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이 헌법재판소의 결정만을 남겨둔 가운데 재판관들의 평의(評議) 과정에 시선이 쏠리고 있다. 평의 내용은 헌법재판소법에 따라 일체 공개되지 않도록 돼 있어 일반 국민은 선고 때 결정문을 통해 결론만 알뿐 도출 과정을 알 수 없다. 그러나 과거 헌재 사건을 되돌아보면 평의는 재판관들 사이에 벌어지는 꽤나 치열한 논쟁 과정이나 다름없다. 법조계에서는 “과거 헌법재판관들이 법전을 집어 던지며 격론을 벌였다”거나 “흥분한 모 재판관이 평의 도중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는 풍문이 전해진다.
전직 재판관들은 “평의 과정에서 재판관들이 얼굴을 붉히는 건 흔한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헌재 결정이 사회에 미칠 파장이 큰 만큼 법리 논쟁이나 절차뿐만 아니라 재판관의 소신, 가치관이 경합하는 싸움터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헌재 개원 직후 구성된 1기 재판부(1988년 9월15일~1994년 9월14일)의 평의 과정은 변정수 전 재판관의 회고록에 생생하게 담겼다.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연기에 대한 헌법소원 사건’이 접수된 뒤 일부 재판관들이 “연말 대선 이후 처리하자”며 평의를 거부하자, 평의를 서두르던 변 전 재판관은 “사건검토보고서라도 읽을 테니 듣기 싫어도 들으시오”라며 보고서를 읽는 등 재판관들 간 마찰이 있었다고 한다. 일부 재판관은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아버리는 등 분위기가 얼어붙었고, 주심의 의견이 무시됐다고 생각한 변 전 재판관은 주심에서 사퇴까지 하게 됐다는 것.
재판부가 의견을 모으기 어려운 사건을 다룰 때는 평의가 1년 넘게 이어진다. 헌재는 사건 처리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각 사건마다 주심 재판관을 지정한 뒤 심리에 필요한 학설이나 판례, 논문 등을 연구하고 검토보고서를 작성해 평의에 올리도록 한다. 익명의 전직 재판관은 “평의 과정에서 주심 재판관이 작성한 보고서가 불충분할 때에는 주심에게 추가보고서를 요구하는 일도 있다”고 말했다. 다른 전직 재판관은 “일반 사건은 많아야 세 차례 정도 평의를 열지만, 의견대립이 심한 사건은 평의가 다섯 차례까지도 열렸다”고 회고했다. 간혹 재판부가 표결을 통해 최종 결정을 내린 뒤에도 ‘재평의’를 요청하는 일도 있다. 이 전직 재판관은 “결정문을 쓰는 과정에서 결정문 초고가 재판관들 사이에 회람되면 ‘이 논리는 조금 이상하다’며 보완을 요구하기도 하고, 의견이 다른 재판관은 ‘나는 별개의견이나 반대의견을 내겠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전직 재판관은 “흥분하면 ‘그러고도 법조인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심한 말이 나오기도 하지만 아주 드문 일”이라며 “자주 얼굴을 보는 사이이기 때문에 누가 어느 대목에서 얼굴 붉힐지 짐작할 만큼 입장을 잘 이해한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2일에도 오전 내내 평의를 이어갔다. 헌재 관계자는 "재판을 통해 이미 쟁점은 다 드러나있다"며“판단이 성숙되어 있다”고 말했다.
박지연 기자 jyp@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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