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개월간 50여차례 빼돌려 해외 원정
판매대금 차명계좌로 받아 써
벌교농협 양곡관리ㆍ도덕적 해이 도마

전남 보성의 한 농협 직원이 미곡처리장에 보관하던 쌀 15억원어치를 몰래 훔쳐 판 대금으로 해외 원정도박에서 나섰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하지만 해당 농협은 이 직원이 1년여 동안 엄청난 양의 쌀을 빼돌렸는데도 이런 사실을 까맣게 몰랐던 것으로 드러나 허술한 양곡관리와 도덕적 해이가 도마에 오르고 있다.
보성경찰서는 2일 자신이 일하던 단위농협 미곡처리장에서 15억원 상당의 쌀을 훔친 혐의(특경법상 업무상 횡령)로 직원 A(36)씨를 구속했다. 또 A씨가 범행에 사용했던 통장을 빌려준 친구 B(36)씨를 불구속 입건했다.
경찰에 따르면 A씨는 지난해 3월부터 12월까지 9개월 동안 자신이 근무하던 보성군 벌교농협에서 총 53차례에 15억3,000여만원 상당의 쌀 3만5,000포대(40㎏)를 몰래 빼돌린 혐의를 받고 있다.
A씨는 고품질의 쌀을 요구하는 구매업자들에게 “농협 저장창고에 재고가 없어 농민들에게 직접 수매해서 보내겠다. 농민 계좌로 대금을 직접 입금하라”고 안심시킨 뒤 B씨 등 지인의 명의로 개설한 차명통장으로 돈을 입금 받는 방식으로 매매 대금을 챙겼다.
이처럼 수개월 동안 농협창고에서 쌀이 사라졌지만 벌교농협과 농협중앙회는 이 같은 사실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A씨는 평소 산지를 직접 찾아가 벼를 수매하는 업무 등으로 출장이 잦고 근무지인 창고와 사무실이 떨어져 있어 상부의 근태 관리가 허술한 점을 악용했다.
A씨는 10여년 간 농협에 근무하면서 내부 유통구조에 밝은데다 미곡처리장의 쌀 구입ㆍ구매 계약과 출하 등 관리 책임을 맡으며 전산 서류상으로 판매량과 재고량을 허위로 맞춰 놓아 상부의 적발을 피했다. 벌교농협은 미곡처리장에 대해 분기마다 정기적으로 감사를 진행했지만 서류만 보고 현장 확인은 하지 않았다고 경찰은 설명했다.
경찰 조사 결과 A씨는 쌀을 훔쳐 팔아 빼돌린 돈으로 마카오와 필리핀 마닐라 등지에서 총 100여일 정도 머물며 도박으로 대부분을 탕진한 것으로 드러났다. A씨는 휴가를 내지 않고 2∼3일씩 주말을 이용해 해외에 나갔으며 1년여 동안 출국한 횟수는 30여차례에 달했다.
벌교농협은 A씨가 지난해 12월 말부터 출근하지 않고 잠적하자 현장 조사에 나서 뒤늦게 양곡창고의 쌀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지난 1월 초쯤 경찰에 고소장을 냈다.
A씨는 경찰이 자신에 대해 출국금지 조치하는 등 수사망을 좁혀오자 지난달 말 자수했다.
경찰은 A씨가 “횡령한 15억원의 대부분을 도박에 사용했다”고 진술했지만 다른 사용처가 있는지, 쌀을 빼돌린 경위와 기간, 다른 직원과의 공모 여부 등에 대해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하태민 기자 ham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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