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범근(64)이라면 당연히 ‘센추리클럽’(국가대표팀 경기 A매치 100회 이상 치른 선수 그룹) 가입 요건을 갖추지 않았을까?
‘한국 축구 역사 복원 작업’은 이 같은 작은 궁금증에서 시작됐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대중화 되지 않았던 1990년대 초반, 축구 마니아들은 당시로서는 최첨단 소통 수단이었던 PC통신에서 활발히 의견을 나눴다. 송기룡(53) 대한축구협회 홍보실장도 그 중 한 명이었다. 대기업을 다니다가 다짜고짜 축구협회를 찾아가 일하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축구에 남다른 애착을 지녔던 그는 축구협회 입사 후 차범근의 기록을 찾기 시작했다. 그 때만 해도 한국 축구의 기록 보존은 형편없었다. 1990년대 이전 기록지가 상당부분 분실됐기 때문이다. ‘전설’ 차붐이 정확히 A매치를 몇 경기 뛰었는지도 불분명했다. 1년 넘게 부지런히 주말마다 국회도서관을 찾은 송 실장은 차붐이 121회의 A매치에 출전했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국제축구연맹(FIFA)으로부터 인정받았다. 한국축구 1호 센추리클럽 가입자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국내 자료만 참고한 송 실장의 기록은 ‘미완성’이었다. 1970년대 한국축구대표팀의 주 무대였던 동남아에서 펼쳐진 수많은 A매치 기록은 국내에서 찾을 길이 없었다. 동남아로 직접 가야 했다. 그 때 송 실장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래! 그 친구가 있었지!’
윤형진(38)씨였다. 윤 씨 역시 엄청난 내공과 방대한 지식으로 무장한 PC통신의 대표 축구논객. 송 실장 부탁으로 윤 씨는 ‘민간조사요원’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2007년 3주 일정으로 동남아로 떠났다.
그렇다면 윤 씨는 누구인가.
그는 축구협회 직원도 아니고, 한국 축구와 관련된 아무런 직함도 없다.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했고 지금은 학원을 운영하는 수학 강사다. 다만 축구 기록에 유독 관심이 많은 ‘사커키드’였던 윤 씨는 대학생 때 축구스포츠기록통계재단(RSSSF)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RSSSF는 전 세계의 ‘축구 기록 마니아’들이 교류하는 공간이다. 회원들과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한국 축구 기록이 너무 부실하다는 점을 뼈저리게 느낀 그는 기록을 직접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약 5년에 걸친 작업 끝에 2005년 11월에 ‘붉은 악마―그 60년의 역사’라는 책을 펴냈다. 1948년부터 2005년까지 한국대표팀이 치른 A매치 654경기의 날짜와 장소, 스코어, 득점자, 출전 명단 등을 각각 한글과 영어로 정리했다. 약 100권을 찍어 주변에 나눠줬다.
송 실장이 한국 축구 역사 복원 프로젝트의 적임자로 축구협회 직원이 아니라 윤 씨를 점 찍은 건 이런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윤 씨는 3주 동안 홍콩과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인도 등 6개국을 돌았다. 아침을 먹고 도서관이나 현지 축구협회와 신문사를 방문해 자료를 뒤지고 저녁 때 호텔로 와서는 기록들을 정리했다. 홍콩과 태국에서는 큰 성과가 없었는데 말레이시아에서 ‘금맥’을 캤다. RSSSF에서 사귄 말레이시아 회원의 제보가 결정적이었다.
“한 말레이시아 회원이 뉴스트레이츠타임즈(NSTㆍ최근 북한 김정남 독살 사건으로 많이 인용 보도되는 말레이시아 일간지) 기자였어요. NST 본사 1층에 가면 메르데카컵(말레이시아 독립을 기리기 위해 개최했던 국제 대회. 한국도 단골로 참가) 기사만 따로 스크랩해놓은 곳이 있다는 거에요. 가보니 정말 당시 기사들을 오려서 정리해 놨더라고요. 복사를 하려고 했더니 너무 비쌌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1장 당 만원 꼴일 정도로 터무니없는? 그래서 필사를 했죠. 동남아 기록 찾기의 뼈대가 말레이시아라고 보면 됩니다.”
여기서 잠깐.
당시 축구협회는 한국축구의 동남아 기록 찾기 프로젝트에 1,000만원의 예산을 배정했다. 윤 씨에게는 비행기 티켓과 숙박료, 법인카드와 출장비가 제공됐다. 그런데 윤 씨는 이 중 400만원을 남겨왔다고 한다. 풍족히 쓰면 3주를 더 편하게 보낼 수 있지 않았을까. “글쎄요. 그 때는 뭐 자료 찾는 데만 집중해서…. 별로 돈 쓸 시간도 기회도 없었어요.”
처음에는 백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심정이었지만 점차 익숙해지자 기록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신문을 보면 여기에 어떤 자료가 있겠구나 하는 감이 왔고 여지없이 들어맞았다. 각 나라별 신문 기사의 형태도 꿰뚫게 됐다.
“영연방의 지배를 받은 싱가포르나 말레이시아는 당시 거기에 살았던 영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영자신문이 활발했어요. 기자들도 대부분 영국 사람들이었고요. 축구가 발달한 영국에서 쓰던 방식대로 기사가 잘 정리돼있죠. 반면 열강의 지배를 받지 않은 태국은 달라요. 영자신문도 별로 없고 자국 신문이 많은데다 그들만의 방식이 있어요. 상대 팀 기록은 없고 태국대표팀 기록만 있는 경우가 허다했죠.”
윤 씨는 한국대표팀 최초의 국제경기인 1948년 7월 6일 홍콩전의 첫 득점자가 누구인지 알아내는 성과를 올렸다. 홍콩전을 최초 A매치로 보는 건 한국이 FIFA에 가입한 1948년 5월 21일 이후 처음 치른 경기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이 경기는 한국의 5-1 승리로 끝났다는 기록만 있을 뿐, 누가 넣었는지는 몰랐는데 고(故) 정남식 선생이 최초 득점자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작년 11월 윤 씨는 두 번째로 동남아 국가를 찾았다. 이번에는 1주일 일정으로 태국과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 세 나라를 방문했다. 특히 태국에 집중했다. 영어가 아닌 태국어 기사만 있어서 9년 전 가장 애를 먹었던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현지 가이드까지 고용했지만 기대만큼 성과는 없었다. 그래도 차범근이 뛴 A매치 몇 경기를 더 찾아냈다. 이제 차붐의 공식 A매치 출전은 136회, 58골이다. 또한 그 동안 70여 회의 A매치에 출전한 것으로 기록돼 있던 김호곤(66)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조영증(63) 프로축구연맹 심판위원장, 박성화(62) 전 올림픽대표팀 감독, 허정무(62) 프로축구연맹 부총재 등이 실제로는 100경기 이상을 출전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덕분에 이들은 뒤늦게 센추리클럽 가입 요건을 갖췄다. 윤 씨는 올해 한 차례 더 동남아 국가를 방문할 예정인데 축구협회는 이 부분까지 반영한 자료를 추후 FIFA에 보내 인증을 받을 예정이다.
아직 찾지 못한 한국 축구 A매치 기록이 약 50경기 정도 된다고 한다. 윤 씨는 “지금까지 노력할 만큼은 다 한 셈이라 새 기록을 찾아내기는 더 힘들어질 것 같다”고 안타까워하면서도 “언젠가는 반드시 마무리해야 할 일이다”고 의지를 보였다.
그는 왜 이렇게 기록을 찾는 일에 매달리는 걸까. 윤 씨는 “A매치 기록이 곧 한국 축구의 역사이기 때문이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가 ‘붉은 악마―그 60년의 역사’를 쓰기 전 큰 울림을 줬던 책이 있다. 일본의 유명 축구 칼럼니스트 고토 다케오가 2002년에 쓴 ‘일본대표 85년사’다. 1917년부터 일본의 모든 A매치가 나열돼있다. 2006년에 개정판도 나왔다. 여기 보면 1942년 8월 16일 일본대표팀이 서울에 와서 조선선발팀과 경기를 해 조선선발이 5-0 완승을 거뒀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일본대표팀에는 고 김용식 선생 등 3명의 한국인이 포함돼 있다. 다시 말해 특급 선수 3명을 빌려주고도 완벽하게 이긴 셈이다. 윤 씨는 “한국 축구 수준이 당시 일본보다 월등하게 높았다는 걸 단적으로 증명하는 자료다. 기록의 가치를 일깨워주는 좋은 예”라고 강조하며 “일본에 저런 책이 있는데 한국도 하나쯤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이어 “기록 찾기는 한국뿐 아니라 한국과 일본 나아가 아시아와 세계 축구의 과거사를 찾는 일이다”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요즘도 시간이 날 때마다 일본, 중국, 북한대표팀의 기록을 찾아본다. 중국은 1970년대 이전에 아예 국제대회에 출전하지 않았고, 북한은 합법적으로 사이트에 접속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지만 윤 씨가 포기하지는 않을 것 같다.
한 번은 그의 이름이 중국 축구계에서 화제가 된 적도 있다.
중국의 최초 센추리클럽 가입자는 대륙의 축구 영웅이라 불리는 판즈이(48)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윤 씨가 1980년대부터 중국대표팀 기록을 추적 하다 보니 1990년대 초반까지 대표 선수로 활약했던 주보(57)의 A매치 기록이 100회 가까이 됐다. 그는 평소 알고 지내던 중국 기자에게 그 동안 모은 자료를 종합해 전달하며 ‘한 번 알아보라. 첫 센추리클럽 가입자가 달라질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이메일을 보냈다. 곧바로 답신이 왔고 중국의 유명 스포츠신문 ‘티탄저우빠오’에서 윤 씨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 때는 그가 미국에서 유학을 하던 시기라 이메일 인터뷰를 했는데 중국 현지에서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다. 또 은퇴 후 축구계에 몸담지 않고 ‘야인’으로 지내던 주보가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기도 했다.
“그 때 많은 중국 팬들이 ‘한국인이 중국 선수의 소중한 기록을 찾아줘 고맙다’고 이메일을 보냈어요. 그 때문인지 이후로 많은 중국 축구 기록 사이트가 생겨 자료를 공유하고 활발히 활동하더라고요.”
내년은 한국 축구가 첫 국제경기를 치른 지 70주년이 되는 해다. 윤 씨는 ‘붉은 악마―그 60년의 역사’ 증보판을 낼 계획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윤 씨와 담배를 같이 피웠다. 기자는 별 뜻 없이 오는 23일 한국과 중국의 2018 러시아 월드컵 최종예선 원정 취재를 위해 중국 창사에 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다음 달 북한 평양에서 여자축구 아시안컵 예선이 있는데 평양 취재가 가능할 것 같기도 하다는 말도 했다. 윤 씨가 눈을 크게 떴다.
“중국에 가면 관계자들에게 주보의 기록이 인정받아서 첫 센추리클럽 가입자가 진짜 바뀌었는지 확인 좀 해주실래요?(위키피디아 자료에 따르면 주보의 A매치는 현재 86경기. 중국의 센추리클럽 가입자는 리웨이펑, 하오하이동, 판즈이 등 3명) 그 뒤로 일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정말 궁금하네요. 북한에 가면 한국에 북한 기록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 꼭 좀 전해주세요. 혹시 도움 받을 만한 사람이 있을지 알아봐 주실 수 있나요? 만약 윤 기자가 평양 못 가면 출장 가는 다른 언론사 기자 소개라도 좀...”
3시간여에 걸친 인터뷰 중 윤 씨의 눈이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다.
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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