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진 영화평론가와 김중혁 작가가 주제에 따라 영화 3편을 매주 소개하며 삶에 대한 통찰을 독자 여러분께 전합니다. 이 평론가는 ‘이 장면 그 대사’ 코너로 명작의 ‘결정적 장면’을 들여다 보고, 김 작가는 ‘이 대사 그 장면’으로 영화 속 유명 대사가 품은 사유를 풀어냅니다.
●업(2009)
칼ㆍ엘리의 결혼 생활을 대사 없이
초반 4분에 압축해낸 시퀀스 압권
그럼에도 나머지 2시간 흥미진진
●니모를 찾아서(2003)
안 웃기는 광대어ㆍ채식주의 상어…
재미있는 캐릭터가 스토리 그 자체
13년 뒤 ‘도리를 찾아서’도 흥행
●토이스토리3(2010)
대학 진학으로 떠나는 주인공이
정들었던 장난감들과 이별하며
“얘들아, 고마웠어” 대사 심금 울려
1995년은 영화가 탄생한 지 정확히 100년째 되는 해였다. 그런데 그 해는 영화의 역사에서 또 다른 사건으로도 기억된다. 그건 바로 픽사 스튜디오의 '토이 스토리'가 발표된 해였다는 사실이다. (물론 뛰어나긴 하지만) '토이 스토리' 한 편이 그 정도로까지 탁월한 작품이라서가 아니다. 최초의 장편 디지털 애니메이션이기 때문이다. '토이 스토리'의 등장은 "이러다 언젠가는 디지털 캐릭터가 인간 배우를 대체하지 않을까" 싶은 두려움에서부터 "이젠 제대로 떠올리기만 하면 표현하지 못할 장면이 없겠다" 싶은 기대감까지 폭넓은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이후 영화 예술은 현실과 상상, 극영화와 애니메이션의 경계를 문질러가며 영토를 적극 넓혀나가고 있다.
하지만 '토이 스토리'를 세상에 내놓은 픽사 스튜디오가 이후 20년 넘는 세월 동안 관객들을 사로잡아온 결정적 이유는 바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가장 기본적인 능력이었다. 아니, 아직도 "그래 봤자 애니메이션"이라고? 픽사의 최고작들은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하고 펼치며 맺는다.
‘업’
'업'(2009년작)의 초반부에는 어린 시절부터 친구로 지내며 함께 꿈을 키우다가 부부의 인연까지 맺은 칼과 엘리의 결혼 생활이 한 호흡에 고스란히 담긴 장면이 있다. 두 남녀가 결혼식을 올린 후 곧바로 집수리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활기차게 시작하던 이 장면은 언젠가 꼭 함께 방문하기로 약속한 머나먼 여행지 파라다이스 폭포로 가기 위해 모았던 돈을 급하게 터진 문제들을 해결하러 번번이 변통해 다 쓰고 마는 상황들로 이어진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병상에 누워 있던 늙은 아내 엘리가 세상을 떠나자, 평생 풍선을 팔아 살아왔던 늙은 남편 칼은 그 직전에 편지를 매달아 아내에게 건네주었던 파란 풍선을 들고서 혼자 집으로 쓸쓸히 돌아간다.
그들의 결혼 생활 전체를 단 4분에 압축해 대사도 없이 그려낸 이 시퀀스는 그 리듬과 위트와 페이소스에서 이제껏 픽사가 만든 최고의 장면으로 손꼽을 만하다. 한 편의 영화로 만들어도 손색없는 긴 내용을 초반에 다 써버리고 나면 나머지 러닝타임은 대체 뭘로 채우냐고?
함께 이루지 못했던 꿈의 잔상과 끝내 지키지 못했던 약속의 이명 속에서 그가 쥐고 돌아온 풍선과 부부의 세월이 담긴 집이 있다. 이제 풍선은 그를 실은 채 파라다이스 폭포를 향해 두둥실 집을 들어올린다. 지나간 시간에 대한 추억과 다가올 시간에 대한 꿈이, 머무르면서 떠나는 역설을 풍선에 매달린 집으로 또렷하게 형상화하는 신비로운 여행. 이런 설정이라면 이후 펼쳐질 모험담은 2시간 정도는 가뿐히 날아가지 않을까.
‘니모를 찾아서’
'니모를 찾아서'(2003년)의 중반부에는 다양한 캐릭터들이 처해 있는 희한한 곤경들이 계속 펼쳐진다. 주인공인 광대어는 이름이 광대어인데도 웃기지 못한다고 수시로 구박받는다. 이 영화 속의 상어는 채식주의자가 되길 원하지만 피 냄새만 맡으면 본능 때문에 저도 모르게 광분하고 만다. 수족관에 사는 줄무늬 물고기 댐즐피쉬는 유리에 반사된 모습을 보고 자신에게 쌍둥이 자매가 있다고 철석같이 믿는다. 수다스런 블루탱피쉬는 기억력이 몇 초 밖에 지속되지 않는 초단기기억상실증이어서 낙관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돌아서면 스스로가 누군지조차 몰라서 새파랗게 질린다.
이렇게 흥미진진하게 만들어놓은 캐릭터들이라면 저절로 에피소드들을 뚝딱뚝딱 생산해내며 이야기가 힘차게 흘러가도록 하지 않을까. 얼마나 잘 빚어놓았으면 조연 캐릭터인 블루탱피쉬 도리를 무려 13년 후인 2016년에 주인공으로 새삼 내세운 '도리를 찾아서'로 애니메이션 역대 최고 흥행기록을 세웠을까.
‘토이스토리 3’
'토이스토리 3'(2010년작)의 후반부에는 대학 진학으로 집을 떠나게 된 앤디가 정들었던 장난감들을 이웃집 어린 소녀 보니에게 넘겨주는 장면이 나온다. 이젠 그냥 처치 곤란한 물건들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앤디는 통째로 넘겨주지 않는다.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가며 보니에게 인사시켜준 뒤 함께 놀면서 준다. 그렇게 건네받은 보니가 즐겁게 노는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앤디는 마지막으로 장난감들에게 이렇게 인사를 건네며 떠난다. "얘들아, 고마웠어."
이런 대사와 행동으로 이야기를 맺으면 그 여운을 어떻게 쉽사리 잊을 수 있을까. 헤어지는 순간을 맞았다고 해서 반드시 한쪽이 배신했거나 다른 한쪽이 잘못한 것은 아니다. 이별이 찾아온 것은 그저 그들 사이에 시간이 흘러갔기 때문이다. 떠나야 할 순간에 할 수 있는 말은 결국 두 가지일 것이다. 미안하다는 말과 고맙다는 말. 픽사는 미안하다는 말 대신에 고맙다고 말을 해야 할 때가 언제인지 마음으로 알고 있다.
이동진 영화평론가·B tv '영화당'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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