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내 얼어 있던 강물이 녹으면서 목 없는 시체 한 구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 “팔 다리는 한남대교에, 몸통은 동호대교에…” 수면내시경을 받던 한 치매 노인이 무의식 중에 살인을 고백한다.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비밀과 맞닥뜨린 의사 승훈(조진웅)은 걷잡을 수 없는 의심과 불안, 공포에 사로잡힌다.
영화 ‘해빙’은 승훈의 불안정한 심리와 왜곡된 시선을 좇아 전개된다. 배우가 해석한 연기에 오롯이 기대어 살을 붙인다. 조진웅은 서스펜스를 주무르며 관객을 예민한 긴장 상태로 몰아넣는다.
영화 개봉을 하루 앞둔 지난달 28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조진웅은 “매우 독특했던 경험이었다”고 돌아봤다. “배우가 캐릭터를 체험하는 방식”으로 연기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다른 영화들은 캐릭터를 설명하지 않아도 기능적 쓰임새가 제시됩니다. 하지만 승훈은 달라요. 배우가 캐릭터를 표현하는 게 아니라 캐릭터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작업이었죠. 계산하지 않은 연기가 필요했고, 의도하지 않은 즉흥성이 튀어나오기도 했습니다. 모든 게 자연스러웠죠. 마치 우리 삶의 한 장면처럼요.” 그래서인지 조진웅은 “영화를 완성한 게 아니라, 완주한 느낌”이라고 했다.
병원 도산과 이혼을 겪은 뒤 신도시 작은 병원에서 계약직 의사로 일하는 승훈은 중산층의 몰락과 그로 인한 사회적 불안을 내포한 인물이다. 원주민과 이주민이 공존하고 아파트촌과 구도심이 대비되는 신도시 풍경도 위태롭고 혼란스럽다. 영화는 종반부에 이르러 승훈의 시선에서 벗어나 새로운 진실을 드러내는데 예상치 못한 충격에 얼얼해진다.
조진웅도 “한 인물이 처절하게 무너져 본질에 맞닥뜨리게 되는 상황이 잔혹하게 느껴졌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이수연 감독의 정서가 무척 ‘다크’하지요. 그러니 이 감독이 만든 요리도 평범하진 않겠죠. 이 영화는 이수연이라는 셰프의 인장과도 같은 메인 메뉴라 할 수 있습니다. 주재료가 저라서 맛은 어떨지 모르겠지만요(웃음).”
조진웅은 자신의 출연작을 대놓고 자랑하지 않았다. 이 영화를 “아이”라고 부르며 “우리 아이가 무척 예민하고 소심하다”고 조심스럽게 감쌌다. 그러면서 “관객들이 영화를 느끼지 말고, 저와 함께 달려봤으면 한다”고 바랐다. “즐길 만큼 편한 영화는 아닙니다. ‘해빙 보고 힘내세요’ ‘중산층의 몰락을 느껴보세요’라고 할 수도 없잖아요. 시국도 시국이고요.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관점에 대한 ‘해석 놀음’이 있는 영화예요. 관객들도 적극적인 해석을 하며 영화를 본다면 제가 느낀 그 재미를 알 수 있을 겁니다.”
그 재미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묻자 조진웅이 능청스럽게 답했다. “그러니까 연기를 해보셔야 해요. 연기만큼 재미있는 게 없어요. 저는 대한민국 국민 모두, 나아가 전 인류가 연기를 해봤으면 좋겠어요.”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