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반대 태극기 물결 눈먼 대통령 사랑
독립ㆍ민주화 위해 흔들었던 가치 훼손
애국 말하기 전에 잘못 없나 먼저 살펴야
언론의 역할을 끊임 없이 되묻는 인상적인 스토리로 인기를 끌었던 미국 드라마 ‘뉴스룸’에 지금도 회자되는 유명한 오프닝 영상이 있다. 주인공인 케이블채널 앵커 윌이 토론 무대에 앉아 있다. 20대가 다수인 청중 가운데서 한 여성이 질문을 던진다. “왜 미국이 가장 위대한 국가인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한 토론자는 “다양성과 기회”라고 말하고 또 다른 사람은 “자유”라고 대답한다. 윌 차례다. 그는 미식축구팀 “뉴욕제트”라고 말했다. 얼버무리고 넘어가겠다는 뜻이다. 사회자가 제대로 답하라고 하자 이번엔 “다양성과 기회, 그리고 자유”라고 앵무새처럼 다른 토론자의 말을 반복한다. 청중에서도 그건 아니라는 반응이 나오고 사회자는 “답하지 않으면 보내주지 않겠다”고 윽박지른다.
윌이 작심한 듯 입을 열었다. “미국은 위대한 나라가 아니다. 그런 증거가 없다. 비문맹률 7위, 수학 27위, 과학 22위, 기대수명 49위, 유아생존율 178위, 중산층 수입 3위, 수출 7위. 우리가 잘 하는 건 딱 3가지다. 인구당 감옥에 가는 비율, 천사가 있다고 믿는 성인 비율, 그리고 국방비.” 이어 “위대했던 적이 있었다”며 “옳은 것을 위해 일어서고 도덕을 위해 싸웠다. 도덕적인 이유로 법을 만들기도 없애기도 했다. 가난과 싸웠지 가난한 사람들과 싸우지 않았다. 희생도 하고 이웃을 걱정했다.… 엄청난 과학 발전도 일궜고 우주를 탐사하고 질병도 치료했다. 세계적인 예술가도 길러냈고 세계 최대의 경제도 이룩했다. 인간답게 행동했고 지성을 열망했다”며 이렇게 덧붙인다. “문제를 해결하는 첫 번째 방법은 문제가 있다는 걸 인식하는 거다. 미국은 더 이상 위대한 국가가 아니라는 것 말이다.”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를 앞두고 난무하는 태극기 물결에서도 이런 눈먼 나라사랑이 느껴진다. “태극기 만세 대한민국 만세 박근혜 만세”를 외치는 탄핵 반대 집회 참가자들에게 태극기는 애국의 징표이자 무조건적인 박근혜 사랑의 증거인 듯 하다. 박근혜 정부가 유별나게 태극기 사랑을 강조하긴 했다. 2015년 초 영화 ‘국제시장’을 본 박 대통령이 청와대 회의에서 "영화에도 부부싸움 하다가 애국가가 들리니까 국기 배례를 하더라. 그렇게 해야 이 나라라는 소중한 우리의 공동체가 건전하게 어떤 역경 속에서도 발전해나갈 수 있는 것 아니겠느냐. 애국가에도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이런 가사가 있지 않느냐. 즐거우나 괴로우나 나라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 발단이었다. 이후 행정자치부가 앞장서 국기 게양률 높이기 운동을 벌였다. 관공서는 말할 것 없고 민간 건물에까지 초대형 태극기가 내걸렸다. 버스 같은 대중교통수단에, 심지어 소주병 라벨에도 태극기가 등장했다. 그런 맹목적인 나라 사랑, 대통령 사랑에 태극기를 동원하는 게 얼마나 볼썽 사나웠으면 광복회까지 “선열들의 나라사랑과 희생정신“이 담긴 태극기를 ”특정 이익을 실현하려는 시위 도구“로 사용하지 말라고 꼬집었을까.
‘뉴스룸’의 윌 대사를 듣다 화제가 되었던 한국의 50가지 OECD 1위 기록들이 떠올랐다. 자살률, 산업재해 사망률, 가계부채, 남녀 임금격차, 노인 빈곤율, 최저임금, 저임금 노동자 비율, 교통사고 사망률, 청소년 행복지수, 온실가스 배출 증가율, 노령화 지수, 국가채무 증가율, 자살 증가율, 실업률 증가폭, 대학교육 가계부담, 사교육비 지출, 근무시간, 공교육비 민간 부담... 윌의 말처럼 이 나라의 무엇이 위대한가를 찾기 전에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를 아는 게 먼저다. 지금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것은 닥치고 나라 사랑이 아니라 이 나라를 더 살 만한 나라로, 사랑할 마음이 샘솟는 나라로 만들어가는 일이다. 외세에 맞서 죽음을 불사하고 흔들었던,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외치며 내걸었던 태극기를 더 이상 맹목적인 애국과 대통령 사랑을 위해 흔들지 말자.
김범수 논설위원 bskim@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