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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행복한 진보를 위하여

입력
2017.02.28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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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행복감을 느끼는 것은 주변에 상식이 충만하고 마음이 따뜻한 이들이 많음을 깨달을 때다. 아이의 생일이 다가오던 얼마 전, 그 ‘행복 멤버’ 중 한명인 아내가 좀 씁쓸한 농담을 던졌다. 예전에 나랑 결혼할 때 사실은 주변에서 걱정을 했더란다. 새신랑이라는 사람이 다녔던 학교의 학부에 전통적으로 ‘빨갱이’들이 많다던데 괜찮을까 하고.

돌이켜 보면, 한국에서 대학에 다니던 시절만 해도 문제의 ‘빨갱이’들이 꽤 많았다. 물론 그런 딱지가 정말로 ‘북한 추종’과 연관할 만한 게 아니라 그저 좌파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현 체제를 비판하는 문화가 팽배했다. 고등학교 시절까지 부당하게 금지 당한 것이 많다 보니, 금기를 넘어서고 동료들과 어울려 쉽게 사회비판을 쏟아내는 재미(?)에 ‘빨갱이’라 불리는 것조차 개의치 않는 대학생들이 많았으리라..

그들 생각에 일부 동의하면서도, 전형적으로 드러내는 태도가 불편한 적이 많았다. 2000년대 초 코소보에서 ‘인종청소’ 명목의 학살이 있었을 때가 좋은 예이다. 미국이 뒤늦게 개입해 학살을 자행한 세르비아군을 공습했는데, 학생회관에서는 앳된 새내기가 팜플렛을 나눠주며 ‘미국의 제국주의적 개입과 주권 침해’를 규탄하는 구호를 외쳤다. 내게 팜플렛을 건네는 학생에게 정색을 하며 “그럼 인종청소를 자행하는 세르비아계는 누가 막나요?”라고 물었다. 생전 그런 식의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는 듯 한참 어리둥절한 표정이더니 겨우 이렇게 대답했다. “여기서 기다리세요. 선배한테 물어보고 올게요.”

당시 학내에 팽배한 운동권 문화에서 자기 생각의 게으름은 종종 가진 자에 대해 분노를 손쉽게 표출하는 것과 궤를 같이 했다. 대부분의 사회 문제를 친일파-재벌 기득권-가진 자라는 ‘악의 축’을 통해서 설명했는데, 종종 그런 구도로만 이해할 수 없는 사회구조의 문제가 있었다. 한번은 사회문제에 대해 습관적으로 ‘가진 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후배한테 정색을 하고, “너는 왜 모든 문제를 가진 자의 잘못으로 환원시키냐?”고 물었다. 그때 그 친구의 대답은 그랬다. 자기는 부자를 증오한다고.

스스로의 생각하려 하지 않고 주변 사람들이 좋아할 생각을 표현하는 데 익숙해지면, 사람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데도 게을러진다. 때로는 자신의 ‘찌질한’ 질시의 마음마저 정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합리화하게 된다. 부단히 다양한 관점을 수용하고 인식과 마음의 폭을 키워야 상식이 충만해지고, 생산적 ‘지행합일’에 근접할 수 있지 않을까. 대학생 시절 바라보았던, 이른바 ‘진보’의 이름으로 토해진 많은 말과 실망스러운 행동은 인간에 대한 신뢰에 생채기를 남겼다. 그들 중 대부분은 평소 자기 행동에서는 상식을 지켜내지도 못했고, 마음이 따뜻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건 진보가 아니었다.

현재는 평소 생각한 ‘진보’에 가까운 모습을 우리 사회에서 많이 발견한다. 새로운 지식의 발견에 순수하게 기뻐하는 자연(보다 드물게는 사회)과학자, 묵묵히 주어진 어려운 과제를 해결해내는 엔지니어, 새로운 기술의 혁신을 이루고 시장을 만들어내는 기업인, 교육 혁신을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실천하는 사회사업가 등. 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풍부한 교양과 상식과 따뜻한 마음을 발견할 때, 나는 우리 사회가 진보할 수 있음을 믿게 된다.

최근 사회에 대한 비판과 분노의 목소리가 크다. 잘못된 일에는 비판하고, 분노해 마땅하다. 그러나 획일화된 비판과 분노만으로는 건설적 대안도, 개인의 행복도 요원하다. ‘진보’를 대변하는 사람들은 그보다 훨씬 폭넓고 깊은 사고력과 실천력을 필요로 한다. 사물의 다양한 측면을 살펴 문제의 구체적 해결방안을 찾는 현명함, 그 문제해결을 통해 다 함께 인간다운 삶의 기쁨을 공유하고픈 정서의 따스함이 필요하다. 미래의 한국 ‘진보’가 그런 모습이길 빈다.

/김도훈 아르스프락시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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