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시청자들도 다 안다. 제목만 봐도 이게 ‘막장’드라마인지 아닌지. MBC만 살펴보자. MBC는 여전히 ‘드라마 왕국’이라고 자평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시청자는 이제 거의 없다. ‘막장드라마 제작소’가 된 지 오래다. 이유는 간단하다. 기획의도와는 전혀 다른 ‘딴 세상’ 이야기가 전개돼서다.
시청률 높은 드라마를 만들기 위한 패턴은 정해져 있다. 온갖 어려운 환경을 극복한 ‘흙수저’ 여주인공을 미끼로 삼는다. 제목에 여주인공 이름을 집어넣는데 웬만하면 다섯 글자를 넘기지 않는다. 여주인공 이름이 제목으로 들어가는 순간 내용은 정해진다. 흙수저에 맞서는 ‘악녀’가 자연스레 등장한다. 방송가(유독 지상파)에서 “악녀 하나만 있으면 드라마는 산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일반화 된 형식이다. MBC 주말극 ‘왔다! 장보리’하면 연민정(이유리), ‘내 딸, 금사월’을 입에 올리면 오혜상(박세영)이 반사적으로 입 밖에 튀어나온다. 지난 26일 종방한 ‘불어라 미풍아’라고 다르지 않았다. 박신애(임수향)가 드라마 제목으로 보일 정도다. 이들 인물 모두 비상식적인 행각으로 시청자를 분노케 했다.
시청률을 끌어 올리기에 동원된 엽기 행각은 악녀라는 표현만으로는 모자라다. ‘불어라 미풍아’의 박신애는 피도 눈물도 없다. 친구인 미풍(임지연)을 속이고 자신이 미풍이 되려 한다. 미풍의 친할아버지가 재벌이기 때문이다. 신애는 기억을 잃고 갑자기 나타난 미풍의 아버지 대훈(한갑수)에게까지 자신이 친딸이라고 우긴다. 드라마는 오혜상과 연민정이 그랬든 정체가 탄로날까 두려운 신애의 ‘원맨쇼’로 채워졌다. 대훈을 납치한 뒤 감금하고, 인신매매를 교사하고, 미풍의 어머니에 대한 살인미수(극중에선 ‘퍽치기’로 묘사)까지 행한다.
드라마 속 악녀는 임성한 문영남 김순옥 작가가 만들어낸 막장드라마 10년 역사를 양분으로 성장했다. 갈수록 교활해지고 악랄해졌다. 이제 지상파 방송의 일일극과 주말극을 책임지는 ‘시청률 바로미터’가 됐다. 공영방송은 악녀를 앞세운 광고판매에만 열을 올리는 형국이다.
무한 경쟁 시대에 접어든 방송 생태계를 감안하면 막장드라마를 없앨 수는 없는 분위기다. 막장드라마라는 현실을 인정하더라도 단순하고도 악랄한 악녀 캐릭터를 받아 들일 순 없다. 방송사들도 이제 공분이 아닌 공감을 살 만한 악녀를 연구해야 되지 않을까. 30대 한 직장인은 “회사에서 악녀란 자신의 일을 철두철미하게 하고선 개인 생활을 즐기는 이기주의자”라고 말한다. 현실의 악녀는 드라마 속 악녀와 달리 남의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는 얘기다. ‘악바리’라고 할지언정 남에게 피해는 주지 않는 게 현실의 악녀들이다.
막장드라마 작가와 PD가 “책 좀 읽으라!”(‘불어라 미풍아’의 시청자게시판)라는 시청자의 호통에서 그나마 자존심을 지키려면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살펴보길 권한다.
kiss@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