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의 속살 우아라즈1에서 이어집니다.
“혹시 친구 만났니?”
순간적으로 상대를 기억해내려고 애썼다.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었나? 상대는 우아라즈의 호스텔 여주인이다.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넓은 마당과 늘 요리 경쟁이 치열해지는 부엌, 방문을 열면 침대와 무릎이 바로 닿는 방이 있는 숙소였다. 페루의 한복판에서 다짜고짜 친구를 묻다니, 숙박비 협상을 위해 대면한 상대가 하는 질문치곤 과하게 친근했다.
“여기 코이카(Koica, 국제협력해외봉사단)라고, 한국 친구들 많이 있어. 이것저것 많이 도와주고 있지. 3일 밤? 깎아달라고? 왜 이래, 친구. 여기 되게 저렴한 곳이야.”
‘한국인=내 친구’의 법칙이라··· 그녀의 과도한 한국 사랑 때문에 협상은 결렬됐다. 대신 ‘투어 삐끼’와의 협상만큼은 유리한 조건으로 하리라 주먹을 쥐었다. 리마에서 밤새 달려온 새벽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만난 우아라즈의 첫 인연. 과연 삐끼에겐 새벽잠도 없는가. 숙소에 1일 차량 투어까지 끼워 파는 유능한 프리랜서였다. 결국 3가지 1일 투어 상품을 90솔(약 3만1000원)로 낙찰했다. 그는 쉬쉬하며 거듭 “비밀”이란 단어를 썼다. 누가 보면 우린 딱 첩보원이었다.
평범한 일상의 달콤함과 평화, 카르우아즈
날이 밝았다. 여전히 몽롱하지만 들뜬 상태다. 높은 해발의 도시는 늘 몸도 띄우고 기대도 띄운다. 오늘의 투어는 우아라즈가 포함된 안카쉬 주의 이웃 마을과 우아스카란 국립공원에 속한 라구나 데 양가누코를 훑는 일정이다.
버스에 몸을 맡기고 인솔자의 꽁무니를 따라 고분고분하면 될 일이다. 이런 안정적인 선택에 대한 일말의 후회를, 버스 밖 풍경이 쓱쓱 지웠다. 녹음이 짙은 산과 설산이 켜켜이 쌓인 풍경이 버스 속으로 달려왔다. 시야를 가리는 나무도, 고층 빌딩도 없다. 설산을 호위하는 보들보들한 구름 떼로 오히려 푸근한 느낌마저 주었다. 트레킹에 도전했다가는 저 풍경을 오롯이 수집할 수 없었겠지? 이동이 편리하다는 이유만으로 투어를 비겁하게 정당화하고 있었다.
“20분!”
첫 행선지인 카르우아즈에 내리는데 인솔자가 뒤통수에 대고 강조했다. 첩보원처럼 민첩하게! 본능적으로 조각처럼 잘 다듬어진 광장의 성당으로 향했다. 푼돈을 쥐어주니, 종탑 입장 허가권이 떨어졌다. 이 교회(Iglesia de la virgen de las mercedes)는 마을을 360도로 조망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전망대다. 유려하게 곡예하는 산의 품에 얌전하게 정박한 마을. 뭐랄까, 뭘 훔쳐가도 씨익 웃어줄 것 같은 평화가 잠식했다. 공원 벤치에 앉아 마을 주민을 구경했다. 이름난 우아스카란 아이스크림(Helados Huascarán)도 혀로 날름거렸다. 이내 옥수수나 전통 과자를 팔려는 여인의 손길과 함께 버스가 자리를 떴다. 다시 버스 밖으로 목가적 풍경이 생중계되었다. 생각했다. 언젠가 앞일이 까마득할 때, 이런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기억이 지독한 향수를 불러일으킬 거라고.
눈물이 만든 라구나 치난코차의 전설
마을을 벗어난 버스는 비포장길에 먼지 바람을 일으켰다. 구불구불 오르막길이다. 입안이 텁텁해졌다. 절편처럼 나뉜 논과 밭, 맨발로 밭을 일구는 사내, 산악 자전거로 투지를 불태우는 여행자가 온통 먼지 옷을 뒤집어썼다. 두 번째 행선지인 라구나 데 양가누코다. 우아스카란 국립공원에 들어섰음을 명징하게 알리는 매표소를 지나자마자 풍경은 성급히 야생이었다. 베일 듯 쩍쩍 갈린 암벽의 위협이 몸을 움츠러들게 했다.
라구나 데 양가누코는 성(性)이 다른 두 호수가 합일을 이룬다. 우리의 목적지는 여자 호수로 알려진 라구나 치난코차. 남자 호수는 라구나 오르콘코차(Orconcocha)다. 우아스카란과 우안도이(huandoy) 설산이 흘린 눈물이 만들어낸 천연 빙하호다. 여기에 로미오와 줄리엣급 사연이 내려온다. 두 라이벌 부족장이 있었다. 부족장의 자식인 외동딸과 외동아들이 깊은 사랑에 빠졌다. 이를 알고 발끈한 부족장은 둘을 떼어 안데스 산맥으로 내쫓았다. 그들의 비극은 이내 트랜스포머 수준으로 설산이 된다. 아들이 우아스카란 산, 딸은 우안도이 산이다. 호수는 죽어서야 기어이 만난 영원한 사랑인 셈이다.
라구나 치난코차에선 쉽게 그 물빛과 크기에 압도당한다. 물빛은 두려울 정도로 터키석 빛깔이다. 면적은 축구장의 77배, 깊이는 11층 빌딩과 맞먹는 28m에 달한다. 호반을 따라 걷는 30여분 트레일은 검은 숲이다. 엿가락 같은 퀘뉴아 나무(Queñua tree)가 휘저어, 피하고 굽히는 기이한 몸놀림이 필요했다. 하늘로 치솟은 암벽은 호수로 연결되면서 그 사나운 발톱을 숨기고 천연덕스럽게 곡선을 그린다. 호수를 넋 놓고 바라봤다. 호수의 밑그림이 구름의 추이에 따라 급변하는 리듬을 탔다. 입김을 불어도 요동칠 것 같던 호수. 우아스카란 설산은 좌우에 병정을 세운 듯한 산세에 꼭 끼어 윤이 났다. 완성된 사랑은 이리도 아름다운가 보다.
자연의 광기와 경외, 캄포 산토 데 융가이
사랑을 품고 간 마지막 코스는 아이러니하게 묘지다. 바야흐로 1970년. 헤비급 재난이 이곳 융가이에 일어났다. 리히터 규모 7.9의 강진이었다. 우아스카란의 산사태로 바위와 진흙에 얼음까지 합세해 융가이로 돌진했다. 시속 547~998km의 무시무시한 속도. 당시 융가이에선 2만여 명이 오순도순 살고 있었다. 도시는 완전히 사라지고 92명만 살아남았다. 당시 마을이 곧 지금의 묘 자리, 캄포 산토 데 융가이다. 안카쉬 주는 이외에도 20세기에만 3번의 산사태 혈흔이 남아있다. 신비의 이면, 자연의 광기다.
지금의 묘지는 잘 조성된 공원 같다. 빛 바랜 하늘색 돔 형태 문을 지나면 우아스카란 산이 얌전히 그림처럼 걸려있다. 5중 추돌 사고에 희생된 듯한 버스와 벽돌 더미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 교회, 우주에서 불시착했다는 게 더 믿겨질 만한 5m 높이의 바위를 지나며 그 날의 처참함을 겨우 짐작할 뿐이다. 자연이 성낸 자리에, 자연이 약동했다. 무성한 풀과 나무, 꽃밭, 비석들이 보상할 길 없는 그날의 희생을 위로했다. 우아스카란 산을 등진 동선의 끝은 희생자의 터다. 양팔을 길게 뻗은 예수상 아래로 계단식 원형 터에 빼곡히 그들의 이름과 나이가 새겨졌다. 예수는 다시 있을지도 모를 횡포를 잠재우듯 우아스카란 산을 관조하고 있다. 손의 방향은 쓰다듬듯 아래다. 입구엔 이런 문구가 쓰여 있었다.
“여기는 바람 따라 바람, 기쁨 따라 기쁨이 있는 신성한 곳이리라.”
우아스카란 산은 울긋불긋한 석양을 깊게 드리우고 있었다.
강미승 여행 칼럼니스트 frideameetssomeo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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