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라이트’로… ‘홍길동 처지’ 된 ‘원조 비스트’
‘홍길동’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슬픔을 타고 났다. 아버지와 형과 피를 나눈 건 확실한데, 신분 때문에 “아버지”와 “형”을 함부로 입에 담지 못한다.
2009년 그룹 비스트로 데뷔한 윤두준 용준형 양요섭 이기광 손동운이 졸지에 ‘홍길동 신세’가 됐다. 홍길동이 ‘호부호형’을 못한다면, 이들은 “비스트”를 입 밖에 내면 눈치를 받는다. 데뷔할 때부터 비스트로 불렸던 가수인데, 8년이나 지나 무대에서 제 ‘이름’을 부르지 못하다니. 윤두준 등 5명이 지난해 전 소속사인 큐브엔터테인먼트(큐브)를 떠나면서 불거진 일이다. 비스트를 기획한 큐브는 다섯 명에게 그룹 이름 사용을 허락하지 않았다.
비스트 전 멤버 5명은 ‘홍길동의 비애’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팀 이름을 새로 지었다. 윤두준 등 5명은 새로 차린 회사 어라운드어스엔터테인먼트를 통해 지난 24일 “‘하이라이트’란 새로운 이름을 활동한다”고 알렸다. 신인그룹처럼 새 그룹 이름을 알리고 ‘두 번째 데뷔’를 하는 촌극이 벌어진 셈이다.
그룹 이름을 둘러싼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진 건 비스트가 처음은 아니다. 전속 계약 문제로 SM엔터테인먼트(SM)를 떠난 김재중 김준수 박유천은 소속 그룹인 동방신기가 아닌 JYJ란 새로운 그룹을 만들어 2010년부터 활동하고 있고, SM에 남은 정윤호와 최창민이 동방신기로 각각 무대에 선다. 모두 동방신기란 같은 팀에서 활동했던 멤버들이었지만, 소속사에 따라 팀 이름이 나뉜 ‘한 그룹, 두 이름’ 사례다.
소속사에 따라 팀 이름의 운명이 엇갈린 점이 ‘동방신기-JYJ’와 비슷한 듯 하지만, 갈라진 비스트의 그늘은 더욱 짙다. 큐브는 지난해 비스트를 떠난 장현승을 다시 비스트에 합류시킨 뒤 새 멤버를 영입해 ‘3인조 비스트’를 꾸리겠다는 발표를 최근 했다. ‘원조 비스트’는 ‘하이라이트’로, 장현승을 제외하곤 누군지도 몰랐던 두 멤버를 ‘비스트’로 불러야 하는 황당한 상황에 팬들은 충격이 클 수 밖에 없다. ‘비스트 원년 멤버’도 당황한 눈치다. 장현승은 큐브의 ‘3인조 비스트’ 발표 소식 직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글을 올려 “태어나서 처음 듣는 이야기”라며 “그럴 생각도 없고”라며 불쾌함을 표한 뒤 글을 내려 ‘잡음’을 예고했다.
‘비스트 사태’를 바라보는 가요계 관계자들은 “안타깝다”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비스트란 그룹을 제작하고 상표권 등록까지 마친 큐브에 권리가 있는 만큼 소속사를 떠난 다섯 멤버에 팀 이름을 내주지 않을 수는 있지만, 새 멤버를 영입해 비스트를 꾸리는 게 기획사의 ‘몽니’로 비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 대형 아이돌 기획사의 이사는 “원년 멤버 5명이 빠진 상태에서 새로 꾸린 그룹에 비스트란 그룹 이름은 의미가 없다”며 “큐브가 새 비스트를 론칭한다고 해도 반발 여론을 뚫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한 가요기획사의 대표는 “하이라이트와 비스트로 팀 이름이 나눠진 건 비스트 전 다섯 멤버와 큐브 모두에게 불행”이라며 “감정적 앙금이 남았더라도 큐브가 비스트 상표권을 전 다섯 멤버에 합당한 가격을 받고 양도하는 식으로 양 측이 어떻게든 합의를 봤어야 했다”고 비판했다.
엠씨더맥스ㆍ신화…. 상표권 분쟁 잦은 이유
‘비스트 사태’는 K팝 아이돌 제작 시스템의 그늘을 여실히 보여주기도 한다. 기획사 주도로 그룹이 만들어지다 보니 소속 가수가 회사를 떠나면 그룹과 관련된 상표권 등 저작권을 둘러싼 ‘알력 다툼’이 자주 벌어진다. 국내 음악 시장에선 팀 이름을 둘러싼 가수와 기획사간 상표권 분쟁이 유독 잦았다.
국내 최장수 그룹인 신화가 2012년부터 2015년까지 3년 동안 ‘신화’란 상표권을 SM으로부터 인수한 오픈월드와, 밴드 엠씨더맥스는 2007년 전 소속사인 유아이엔터테인먼트와 법정 공방을 벌인 끝에 상표권을 간신히 얻는 홍역을 치렀다. 음반 제작사와 매니지먼트사가 철저히 분리 돼 한국처럼 기획사의 힘이 크지 않은 영국과 미국 음악 시장에선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풍경이다. 젝스키스는 데뷔 당시 기획사인 DSP미디어가 상표권을 따로 갖고 있지 않아, 지난해 YG엔터테인먼트에서 별 탈 없이 원래 이름으로 멤버들이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김상화 음악평론가는 “영ㆍ미권 음악시장에선 상표권 분쟁 주체가 기획사와 개인이 아닌 이탈로 인한 그룹 멤버간 소송이 주를 이룬다”며 “기획사 주도로 이뤄지는 K팝 아이돌 시스템이 바뀌지 않는 한 상품권 갈등은 반복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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