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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인간이 소모품이 아닌 사회를 꿈꾸며

입력
2017.02.26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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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국가의 가장 큰 미덕은 인간을 사회 운영의 중심에 놓는다는 것이다. 인간을 사회를 위해 쥐어짜야 하는 소모품으로 취급하거나, 성장을 위해 이용하는 도구로 취급하지 않는다. 인간을 중심으로 사회제도를 배치할 때 우선 고려하는 것은, 개인들이 이 사회에서 괜찮은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판단이다. 이렇게 인간의 필요가 사회운영의 원칙과 우선순위를 지배할 때 복지국가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며칠 전 저출산대책, 국민연금 수급연령 인상안 등이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휴학 등 졸업 유예에 대한 경제적 벌칙 부과, 국민연금을 받는 표준 나이를 65세에서 67세로 늦추자는 제안이 있었다. 특히 제안된 저출산 대책은 인간과 생애과정을 도구화시킨다는 점에서 박근혜 정부에서 나온 ‘가임여성 분포도’와 맥락이 다르지 않다. 국민연금 수급연령 인상 역시 연금재정 개선을 도모하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현실의 정년제도와 노후소득 공백, 나쁜 고령자 고용의 질, 낮은 연금액 등 개인이 맞닥뜨리는 삶의 문제와 어긋나 있다. 두 제안의 공통점은 사회유지를 중심에 놓고 사람들의 행위를 처벌하고 욕구를 유보시킨다는 데 있다.

사회와 제도의 유지를 개인의 삶보다 우선시하는 이런 사고가 결혼과 출산을 미루고 거부하게 만든 원인 그 자체일 수 있다. 즉, 사회의 번영을 위해 개인은 빨리 결혼하고, 아이 낳고, 취업하고, 항상 최고의 성과를 산출해내야 하는 존재로 취급되며, 개인은 그 궤도에 빨리 오르기 못하면 도태된다는 불안에 시달린다. 개인의 선택지는 궤도 진입에 노력을 경주하거나, 포기 혹은 거부하는 것뿐이다. 모두 연애, 결혼, 자유,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생애과정과 소질에 따른 다양한 선택지는 고려되지 않는다. 개인의 정체성과 욕구 인정, 행복 추구에 대한 지지는 찾아볼 수 없다.

1997년 말 경제위기 이후 20년이 흘렀다. 20년 동안의 사회 패러다임 전환 결과, 삶의 질 면에서 한국사회는 실패했다. 궤도에 오른 자와 그러지 못한 자 사이의 간극은 너무 크다. 궤도에 오른 자는 불안해졌고, 오르지 못한 자의 고통은 더욱 깊어졌다. 이 와중에 가족은 계속 생존의 책임을 요구 받고 있다. 경쟁력 확보를 명목으로 ‘살아남으라’는 말로 다그치는 것은 사람들을 우울하게 할 뿐이다. 사회를 위해 아이를 낳고, 직장에 헌신하라는 메시지가 통하는 시대가 아니다. 게다가 4차 산업혁명 운운하며 일자리가 사라지는 것을 당연한 미래로 말하는 데 누가 자신있게 출산을 권할 수 있는가?

저출산은 개인의 일방적 인내와 도구화를 거부한 결과이자 일종의 수동적 저항이다. 사회번영을 내세우고, 개인의 욕구를 전체 사회에 종속시키는 방식으로는 오히려 사회의 유지조차 어렵다. 노동, 가족, 사회의 근본적 변화 없이, 지난 10년간 저출산 대책에 얼마를 썼건 이는 중요하지 않다. 지옥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옥의 불길을 덜 뜨겁게 만드는 데 돈을 썼다는 것이므로.

차기 정부가 책임지는 5년은 힘든 시기가 될 것이다. 박근혜 정부에서 출산률은 정체되었고, 조선업, 해운업 등 주요 산업들의 쇠락은 대량실업의 긴 그늘을 드리울 것이다. 청년실업 문제는 만성화되어 있다. 우리 사회는 획기적인 실업수당제 도입 등 이전과 다른 차원에서 고용지원과 복지제도를 구상해야 하는 환경에 있다.

다음 5년은 사회 패러다임을 바꾸는 시기가 되길 바란다. 개인의 행복, 삶의 문제를 중심에 놓고 교육과 고용, 저출산대책, 소득보장 등을 재구성해내길 바란다. 복지국가 역사에서도 가장 어려울 때 인간의 욕구를 보듬는 복지제도들이 만들어졌고 사회의 변화가 이루어졌다. 지금 위협과 분열의 언사가 난무하지만, 결국 시민들이 만들어낸 희망이 새로운 합의와 변화의 동력이 될 것이라 기대한다. 이것을 실현해내는 것이 우리가 기대하는 정치이다.

주은선 경기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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