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단 ‘교황 흔들기’로 바티칸이 어지럽다. 진보적 성향의 교황에 항명한 가톨릭계 대표 보수파 몰타 기사단 단장이 지난달 말 사임하면서 보혁 갈등은 일단락 되는 듯 보였으나 끝난 게 아니었다. 최근 교황을 비판하는 벽보가 로마 전역에 나붙고 교황을 조롱하는 가짜뉴스가 등장하는 등 갈등은 재점화하는 양상이다. 일부 추기경들은 이례적으로 성명을 내는 등 교황을 옹호하는데 나섰다.
거세지는 보수파들의 반발…참다 못한 반격도
4일부터 이탈리아 로마 전역에서는 단호한 표정의 프란치스코 교황의 얼굴 사진이 담긴 교황 비방 벽보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벽보에는 자비의 아이콘인 교황을 비꼬듯 ‘당신의 자비는 어디에 있습니까(Where’s your mercy?)’라는 물음과 함께 “몰타 기사단을 질식시켰다. 추기경들을 무시했다”는 내용이 실렸다. 누가 한 일인지에 대해 경찰 조사가 이뤄지고 있지만, 교황의 개혁적 행보에 반감을 품은 가톨릭 보수파의 소행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벽보가 붙은 지 일주일도 채 안 된 시점에는 바티칸 일간지 로세르바토레 로마노를 모방한 가짜뉴스가 나돌았다. 외신들은 ‘교황이 가짜뉴스의 타깃이 됐다’며 보도를 쏟아냈다. ‘그가 답했다’는 제목의 가짜뉴스는 교황이 추기경들의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않음으로써 교황이 문제에 대한 명확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 의심을 품게 하는 교황의 가상 인터뷰를 싣고 있다.
상황이 이렇자 교황청 소속 9명의 추기경자문단은 보수파들의 공격이 도를 넘었다고 판단, 13일 교황을 옹호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교황의 직무, 교황이 임명한 성직자들과 교황의 가르침을 전면적으로 지지한다는 내용이었다. 추기경자문단은 2013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즉위한 뒤 재정 및 구조 개혁을 위한 자문을 맡기기 위해 임명한 9명으로 구성돼 있다. 14일에는 교황청 교회법평의회 의장인 프란치스코 코코팔메리오 추기경이 이혼한 신자를 포용하는 교황의 행보를 지지하는 책을 발간했다. 코코팔메리오 추기경은 교황 비방 벽보에 대해 “혐오스럽다. 예의범절 차원에서 옳지 않고,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라고 언급했다.
교황에 “입장 밝혀라” 압박하고 항명도
교황에 대한 이 같은 비판은 교황의 거침 없는 개혁 행보에 보수파들이 불안을 느끼면서 비롯됐다. 한 예가 교황이 가톨릭 교리에서는 인정하지 않는 이혼, 재혼, 동성애 등을 포용해야 한다고 강조해온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5년 10월 세계 주교대의원대회에서 이혼한 신도의 처우 문제와 관련, “이들을 파문하는 식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 이들은 언제나 교회의 일부분”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갈등이 외부로 크게 드러난 건 지난해 11월로 거슬러 올라 간다. 레이먼드 버크 추기경을 포함한 보수 성향의 추기경 4명은 이혼ㆍ재혼한 신자들을 포용하려는 교황에 명확한 입장을 묻는 내용의 서한을 공개하며 교황과 대립각을 세웠다. 9월에 보낸 서신이지만 교황으로부터 답을 받지 못하자 항의의 뜻에서 노출한 것이다.
갈등은 ‘콘돔 스캔들’로 증폭됐다. 콘돔 스캔들은 지난해 12월 알브레히트 폰 뵈젤라거 몰타 기사단 부단장이 감독하는 자선단체가 미얀마에서 가톨릭 교리를 깨고 콘돔을 배포한 것과 관련, 그 책임을 물어 부단장을 해임한 사건을 말한다.
뵈젤라거 부단장은 억울함을 호소하며 교황청에 진상 조사를 요구했고, 교황은 부단장의 요구를 받아들여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조사에 나섰다. 후천성면역결핍증(에이즈) 치료와 가족 계획을 위한 콘돔 배포 프로그램에 관해 알지 못했고, 알고 난 후 즉각 배포를 중단했다는 게 부단장의 해명이었다.
하지만 몰타 기사단은 내정 간섭이라며 크게 반발했다. 매튜 페스팅 몰타 기사단 단장은 간부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교황이 임명한 위원회는 문제를 객관적으로 풀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말하는 등 교황의 권위에 도전했다. 몰타 기사단은 전통과 서열을 중시하는 가톨릭계 대표 보수파다.
바티칸 보수-진보 힘겨루기, 그 결말은?
일부 추기경들이 교황을 지지하는 성명을 내긴 했지만 교황과 교황의 측근들은 대체로 크게 염려하지 않는 분위기다. 교황의 친구이자 로세르바토레 로마노 신문의 편집장인 안토니오 스파다로는 “가짜뉴스로 매체를 홍보해줘서 고맙기까지 하다. 그들의 비방은 오히려 교황이 잘 하고 있다는 신호”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익명을 요청한 바티칸 관계자도 미 N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걱정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교황은 비방 벽보와 자신을 소재로 한 가짜뉴스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지만 지난해 11월 일부 추기경들의 비판을 어떻게 느끼느냐는 질문에 “잠을 못 잘 정도는 아니다”라며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계속된 갈등 노출로 바티칸이 혼란에 빠지자 교황이 보다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오피니언면에서 “바티칸은 정쟁에 직면해 있다. 극단적인 이들을 잠재우지 않으면 교황권은 분열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수세에 몰린 보수파들의 행보와 함께 교황의 대응에 주목이 가는 시점이다.
채지선 기자 letmekno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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