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싱 룸의 쿠데타가 감독을 몰아냈다.’
영국 일간지 미러는 24일(한국시간) 클라우디오 라니에리(66) 레스터시티 감독의 경질 소식을 이렇게 전했다. 선수들이 불만을 품고 감독을 쫓아냈다는 뜻이다. 미러는 “구단은 감독이 아닌 선수들을 택했다”고도 했다.
1884년 창단 후 늘 2부, 3부 리그를 오가는 보잘것없던 레스터시티를 지난 시즌 창단 132년 만에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첫 우승으로 이끌며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던 라니에리 감독의 동화 같은 스토리는 ‘새드엔딩’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레스터시티는 올 시즌 앞두고 ‘중원의 살림꾼’ 은골로 캉테(26)가 첼시로 떠났다. 하지만 새로 영입한 이슬람 슬리마니(29)는 기대 이하였다. 지난 시즌 우승의 주역 제이미 바디(30)와 리야드 마레즈(26)도 인상적인 활약을 못 보였다. 강한 압박에 이은 역습으로 상대를 무너뜨리던 모습도 사라졌다. 성적은 곤두박질쳤다. 올 시즌 현재 강등권인 17위(5승6무14패ㆍ승점21)다. 최하위 선덜랜드(승점 19)와 승점 차가 거의 없다. 지난 23일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16강 1차전에서는 세비야(스페인)에 1-2로 패했다. 레스터시티가 2부로 떨어지면 1938년 맨체스터 시티 이후 79년 만에 직전 시즌 우승 팀이 강등당하는 불명예 사례로 남는다. 아이야왓 스리바다나프라바 레스터시티 부사장은 이날 “구단을 맡은 지 7년 만에 내린 가장 어려운 결정이다. 라니에리 감독에게는 영원히 감사하다. 하지만 개인적인 감정을 버리고 구단의 장기적인 이익을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밝혔다.
라니에리 감독과 선수들 사이에 불화가 있다는 말은 꾸준히 들려왔다.
발단은 ‘치킨 버거’였다. 강등 문턱까지 떨어진 팀 분위기를 다잡기 위해 라니에리 감독은 선수들이 평소 즐겨 먹는 치킨 버거를 훈련장 메뉴에서 없애고 파스타로 대체했는데 몇몇 선수들이 반기를 들었다는 보도가 터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지난 시즌에는 같은 인스턴트식품인 ‘피자’가 정반대로 소통을 상징했다.
라니에리 감독은 지난 시즌 크리스탈 팰리스와 경기를 앞두고 무실점하면 피자를 사겠다고 약속했다. 1-0으로 이겨 실제 피자를 샀고 이후 7경기 연속 무실점 행진이 이어졌다. 레스터시티를 맡기 전까지 15개의 프로팀을 지휘하며 한 번도 1부리그 우승을 차지하지 못하고 베스트11을 자주 바꾼다고 해서 ‘실험가(tinkerman)’라는 비아냥을 듣던 그는 진정성 있는 대화와 상대를 배려하는 따뜻한 카리스마로 레스터시티 선수들의 열정에 불을 지폈다.
하지만 올 시즌 팀이 부진에 빠지며 라니에리 감독은 자신의 최대 무기였던 소통을 잃어버렸다. 이달 초에는 그가 예정에 없던 아침 훈련을 배정하고 경기 직전에 전술을 변경해 선수들의 신뢰를 잃었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조제 무리뉴(54)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은 자신의 SNS 계정을 통해 “잉글랜드 챔피언과 국제축구연맹(FIFA) 올해의 감독이 잘렸다. 아무도 당신이 쓴 역사를 지울 수 없다. 기운 내라”고 격려했다. 라니에리 감독 경질은 그가 올 1월 10일 FIFA 올해의 감독으로 선정된 지 불과 46일, 작년 5월 3일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확정한 지 298일 만이다.
레스터시티는 새 감독 선임 전까지 크레이그 셰익스피어(54), 마이크 스토웰(52) 골키퍼 코치가 팀을 이끈다. 차기 사령탑으로 로베르토 만치니(53) 전 맨체스터 시티 감독, 앨런 파듀(56) 전 크리스탈 팰리스 감독 등이 거론된다.
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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