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화장실 아래로 휴대폰
성폭력 피해 당한 여대생
검찰 조정실 불러 합의 종용
가해자ㆍ가족 앞 실명까지 노출
검찰이 성폭력 피해 여대생과 가해자를 형사조정실로 같이 불러 대면 합의를 종용한 것으로 드러나 논란이 일고 있다. 여대생은 피해자의 신상을 그대로 가해자에게 노출시키는 상식 이하의 검찰 조정 방식에 충격을 받고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경북 경산의 한 대학교 재학생인 장현희(23ㆍ여ㆍ가명)씨가 같은 학교 남학생 A(23)씨로부터 성폭력 피해를 당한 것은 지난해 12월20일이다. 이날 낮 12시쯤 이 대학교 한 단과대 6층 여자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던 장씨는 옆 화장실 아래 틈새로 자신을 찍는 휴대폰을 발견, 경찰에 112 신고했다. A씨는 현행범으로 체포됐고 장씨는 경찰 조사에서 자신의 얼굴과 이름이 노출되지 않도록 당부했다.
이후 노이로제 상태에 이를 정도로 극심한 고통에 시달린 장씨는 최근 검찰에서 또 한 번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검찰 형사조정실로 출석해달라”는 전화를 받은 장씨가 20일 대구지검 형사조정실에 가니 A씨와 A씨의 가족들이 나와 있었던 것. 곧이어 형사조정실 측이 장씨의 실명을 불렀고, A씨와 가족들도 함께 방으로 들어오는 촌극이 빚어졌다.
장씨는 강하게 항의한 후 혼자 형사조정실에 남겨졌다. 장씨는 “조정위원 L모씨의 간단한 질문 후에 조정위원실 변호사가 10여 분간 ‘초범이고 반성하고 있으니 합의를 해주는 것이 좋다’는 식으로 얘기했다”고 주장했다. 변호사는 합의를 거부하는 장씨에게 “가해자 형량이 낮은 게 아니다. 요즘은 여자 손만 잡아도 일이 나는 여자세상”이라며 합의를 재차 종용했다.
L씨는 합의 불발 후 장씨에게 “가해자가 휴게실에 있으니 그냥 나가면 된다”고 말했으나 문 앞에는 여전히 A씨의 아버지가 버티고 있어 도망치듯 검찰청사를 빠져 나와야 했다.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24조에는 ‘성폭력범죄의 수사 또는 재판을 담당하거나 이에 관여하는 공무원은 피해자의 인적사항과 사진 또는 사생활에 관한 비밀을 공개하거나 누설해서는 안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경찰에서 넘어온 사건 서류에는 피해자와 가해자를 분리해 달라는 문구가 없었고 장씨가 조정을 거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출석시켰다”는 게 조정위원 L씨의 설명이지만 장씨는 “합의 얘기는 없었고, 정신적 피해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서 출석했다”고 말했다.
대학 측도 합의를 종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A씨가 재학 중인 학과의 학과장이 장씨와 장씨 아버지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 “가해자는 착하고 성실한 학생이니 선처해 달라”고 선처를 요구했다.
장씨는 “가해자 얼굴이 시도 때도 없이 떠올라 심장이 두근거리고 무서워 잠도 오지 않고 외출도 하지 못하고 있다”며 “성폭력피해자를 가해자와 한 공간에 앉히려는 검찰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대구=김민규기자 whitekm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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