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에 할머니는 먹성이 별로인 어린 손자가 늘 안쓰러우셨다. “옆집 호영이는 김칫국물에 밥 말아서도 한 그릇 뚝딱인데 너는 왜 그리 안 먹냐”며 혀를 차셨다. 1970년대 초만 해도 귀했던 라면을 손수 양은냄비에 끓여 주시곤 했던 것도 어린 것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마음이셨을 게다. 하지만 할머니껜 내가 라면 먹는 것도 성에 차지 않으셨다. 할머니는 “아이구, 영양가 있는 국물은 다 남겼네. 식기 전에 얼른 훌훌 마시거라”하시며 자리도 뜨지 못하게 하셨다.
▦ 나중에 그 옛날 할머니의 라면 국물 얘기가 나왔다. “어휴, 그게 무슨 사골국물이라고”하며 실실거리자, 어머니도 웃으시며 한 말씀이다. “미개한 시절에 어디 그뿐인 줄 아니? 옛날에 너네 고모 젊어서 배앓이 할 땐 아편을 먹였고, 너네 아버지 무좀엔 수은 태워 발가락에 연기 쏘이곤 했단다. 좋자고 한 게 다 독(毒)이었던 거야. 어리석어 그런 일이 벌어진 거지…” 하지만 어디 한 집안의 옛 어른들뿐이랴. 해악을 부른 어리석은 선의의 사례는 세상사에 차고 넘친다.
▦ 중세 유럽에 흑사병이 창궐하자 교회의 선의는 사람들을 모아 일심으로 하나님께 구원의 기도를 올리는 쪽으로 작동했다. 그게 역병을 더욱 확산시키는 치명적 해악을 낳았다. 문제는 무지한 선의뿐 아니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가브리엘 마르케스는 소설 ‘사랑과 다른 악마들’에서 인간의 선의가 어떻게 극단적인 해악을 낳게 되는지를 그려냈다. 작품에서 한 소녀를 구원하려는 사람들의 사랑과 선의는 그들 자신의 어리석음과 광기, 아집과 무지에 의해 터무니없이 뒤틀리고 마침내 소녀를 죽음으로 몰아간다.
▦ 대선 주자인 안희정 충남도지사가 요즘 박근혜 대통령의 ‘선한 의지’를 인정하는 발언을 했다가 사방에서 욕을 먹고 있다. “선한 의지로 국민을 위해 좋은 정치를 하려고 했는데 법과 제도를 따르지 않은 게 문제였다”는 요지의 얘기였다. 안 지사가 박 대통령을 옹호한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오히려 아무리 선의라도 잘못하면 나라를 망치는 치명적 해악을 낳을 수 있다는 위험을 강조한 얘기일 수 있다. 박 대통령 측도 ‘선의’를 내세울 게 아니다. 설령 선의가 사실이라 해도, 결과적으로 망국적 상황을 부른 대통령의 어리석음과 무지, 실정에 대한 정치적 책임은 여전히 면키 어렵기 때문이다. 장인철 논설위원 icj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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