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모 대변인 박재원이 간다 <11ㆍ끝>
정찬필 미래교실네트워크 사무총장
우리나라 최고 이공계 대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에게 들은 얘기다. 그는 최근 ‘거꾸로 교실’로 강의 방식을 바꿔봤다고 한다. 필요한 강의는 동영상으로 집에서 보게 하고 수업시간에는 조별 과제를 해결하라고 했다. 그랬더니, 소위 ‘엘리트 학생’들의 문제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고 한다. “그 동안 학생들은 다른 사람의 얘기를 경청할 줄도, 협력할 줄도 몰랐던 거에요. 그저 자신의 능력과 지식만 믿어왔던 거죠”.
그래서 우리나라에 '거꾸로 교실'을 도입한 전직 KBS 피디, 지금은 교육시민단체 ‘미래교실네트워크’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정찬필씨를 만나 자세한 얘기를 들어봤다.
_‘거꾸로 교실’을 시작한 계기가 있었을 것 같은데.
“방송 프로그램을 준비하면서 처음부터 시대에 완전히 뒤떨어져 버린 공교육의 문제, 단순하게 한국 교육의 문제가 아니라 글로벌 수준에서 공교육 변화의 지체현상을 굉장히 심각하게 봤습니다. 교사가 교실 수업을 통해 실현할 방법을 찾기 위해 광범위하게 조사하다가 ‘플립 러닝(flipped learningㆍ거꾸로 교실)’이라는 개념을 발견했는데 현실적인 솔루션을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정말 빠른 속도로, 21세기가 요구하는 패러다임에 맞는 교육을 실현할 수 있겠다는 거죠. 또 하나. 왜 한국에서는 아무도 몰랐지 하는 생각이 들었죠. 개인적으로는 횡재했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우리 교육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상징하여, 핵폭탄 터지는 장면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렸다고 했다.
_방송 소개에 그치지 않고 아예 교육시민단체를 만들어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는데 어려움은 없나.
“교육의 위기 앞에서 아이들의 미래가 없다는 걸 다 알아요. 하지만 입시제도가 바뀌지 않으면 못 바꾼다, 다들 학원에 보내는데 학부모들의 인식이 안 바뀌어서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는 선생님들. 교육이 바뀌려면 교사들이 달라져야 하는데 그렇게 바뀔 리가 없다는 교육학자와 정책 관계자들. 그들 사이에서 ‘변명의 카르텔’을 봤어요. 해결의 주체가 되어야 할 사람들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 대상들이 아주 안정적으로 있는 겁니다. 책임회피에 익숙해져 변할 수가 없는 상황이에요. 어딘가 약한 고리를 건드려서 허물어 버리지 않고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막상 시작해보니 교사가 의외로 빠르게 바뀌더라고요. 유효한 솔루션이 보이니까 ‘훅’하고 달려드는 현상이 나타나는 거예요. 지금까지 교사들이 왜 안 바뀌었을까요? 유효한 솔루션이 없었던 겁니다. 뭔가 해봤는데 안 변하니까 혹은 너무 많은 개인의 희생과 노력을 요구하니까 못 했던 겁니다. 대한민국 교사들은 변하지 않는다고 했던 사람들한테 대단히 큰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거꾸로 교실을 통한 수업의 변화가 견고한 카르텔의 고리를 굉장히 쉽게 무너뜨리고 선순환의 구조로 바뀌는 모습을 보게 된 거죠. 저희 단체의 슬로건입니다. ‘모두가 교육의 위기를 걱정하고 있을 때 우리는 희망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걱정하지 말고 그냥 솔루션 만들자는 거죠. 모두 걱정은 많은데 불평하고 비난하는데 굉장히 많은 에너지를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_'거꾸로 교실'에서 확인한 아이들의 변화가 궁금한데.
“우선 잠자는 아이들이 일어나서 수업에 참여하는 모습을 기대했어요. 그런데 시작하자마자 놀라운 일이 생겼죠. 아이들의 표정이 살아나는 거예요. ‘학교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겠는데 아이에게서 중2병이 없어졌어요’라는 얘기를 학부모가 합니다. 너무 재미있어서, 국어 수업이 너무 재미있어서, 주말만 되면 학교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다는 거예요. 과장이 아니라 부모들이 너무 이상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생각이 바뀌는 거예요. 사회에 만연한 중2병이 아이들의 문제가 아니었구나, 사실은 학교가 만들어 낸 거구나, 아이들한테 오히려 병을 심어준 거구나. 시험을 봤는데 특히 자타공인 학업능력이 없다고 생각했던 하위권 아이들이 굉장히 빠른 속도로 성적이 오르는 현상이 나타난 거예요. 그때 저희 제작진끼리 한 말이 이랬습니다. ‘학교가 그동안 돌무덤 역할을 한 거다. 얘들을 하나씩 계속 돌무덤 안에 집어넣고 못 나오게 막고 있던 거다. 잠재력을 발휘할 수 없도록 계속 눌러놨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타난 현상을 지금 어른들은 아이들의 문제라고 뒤집어씌우고 있는 거다. 지금 아이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을 아이가 가진 본래 모습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착각이다. 어떤 아이인지는 자신의 잠재력을 분출할 수 있는 통로가 주어졌을 때 보이는 모습을 봐야 알 수 있다.’ 이렇게 기존의 관점들이 다 무너져 버렸어요.”
아이만 생각하면 불안하고 온갖 걱정에 전전긍긍하는 학부모들에게 정 사무총장은 질문을 던진다.
“본질적인 질문을 다시 던져야 합니다. 진짜 어떻게 하는 게 아이의 인생에 도움이 되는 능력을 길러주는 걸까? 지금 엉덩이 붙이고 문제 많이 풀어 성적 잘 받으면 특목고 가고, 또 성적 잘 받으면 좋은 대학 가고, 또 열심히 하면 좋은 직장을 갈까. 이렇게 부모가 원하는 길을 따라가면 진짜 세상 살아가는 데 굉장히 취약한 아이를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 자기 혼자 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지 못하고 정해진 답을 내는 훈련만 된 아이로 만들어서 사회에 내보내는 건데 그런 아이들을 누가 원하겠어요. 이런 식으로 아이를 끌고 가는 게 정말 허망하다는 것을 아는 게 저는 변화의 핵심이고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아이가 성인이 돼서 잘 살게 하는 게 목적이라면 그것에 맞게 방향을 잡고 개입하는 방법들도 다 바뀌어야 한다는 거예요. 거꾸로 교실을 도입한 선생님들이 스스로 주체가 되는 수업을 통해 아이들을 바꾸었는데 본인의 아이들은 학교에 가서 방관자가 되는 교육을 받는 거죠. 그런데 저도 마찬가지이지만 이 선생님들이 아이들한테 많은 것을 맡겨주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줬을 때 어떻게 변하는지를 봤으니까 실제 가정에서 자기 아이를 대할 때 태도를 많이 바꾸는 겁니다. 거꾸로 교실의 교육철학은 가정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겁니다. 지금 보여주는 것이 아이의 원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저나 선생님들이 이미 깨달았기 때문에 달라진 거겠죠.”
사교육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법도 찾았다고 한다.
“저희가 첫 번째 시즌부터 예상하고 기대도 했었는데 한 학기가 끝날 쯤 아이들한테 자연스럽게 ‘학원 다니지 않기로 했어요’라는 말이 나오더라고요. 그 동안 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능력을 다 죽여 버렸으니까 학원에 의존했다면 자기들끼리 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순간, “왜 시간을 낭비해?”라는 생각이 드는 거죠. 1년 지나 다시 갔더니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우리 학교 아이들이 학원을 거의 다 그만뒀다는 거에요. 물론 학부모들의 불안감, 당연히 이해할 수밖에 없죠. 공교육에서 실제 학습효율이 제대로 나오지 않으니까 사교육에 의존해온 건데 부모들 보고 사교육은 독이라고 백날 이야기해봐야 의미 없어요. 누구를 탓하거나 법으로 규제하는 식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학교 교육의 질적 전환이 되면 자연스럽게 풀리는 겁니다. 저는 사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대신 사교육이라는 개념 정의를 다시 해야죠. 없어져야 할 사교육은 학교의 정규 교과를 보완하고 대체하는 사교육인 거죠. 그런 사교육은 거꾸로 교실에서 보여준 스스로 노력하는 아이들한테 맡겨 해결하면 되는 것이고 공교육에서 해결할 수 없는 영역들로 사교육이 나가준다면 협력 관계가 될 수 있겠죠.”
'거꾸로 교실'의 경험이 아빠 역할에도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고 한다.
“제가 KBS에서 거꾸로 교실 프로그램을 시작했을 때 정말 무기력한 중학교 2학년 남자아이가 있었어요. 말도 잘하고 창의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중학생이 돼서 1~2년 지나니까 맛이 간 거예요. 너무 화가 나서 뭐라 하기도 했죠. 그런데 거꾸로 교실 프로젝트를 하면서 알게 됐어요. 아이의 문제가 아니라 학교가 이렇게 만들었다는 걸요. 게임중독 상태였는데 엄마와 상의해서 아이가 무슨 짓을 하든 건들지 않기로 했어요. 무한 자유를 주기로 했어요. 한 달 정도는 정말 미친듯이 게임만 하는 거예요. 날마다 엄마가 전화해서 울고 했지만, 제가 달라진 교실에서 달라진 아이들을 봤기에 믿고 기다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한 달쯤 지나니까 아이가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아무도 안 건드리니까 스스로 성찰하고 이것저것 찾아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결국은 애니메이션을 하고 싶다고 해서 얘기를 들어보니 이것저것 많은 고민이 들어가 있었죠. 올해 고3이 되는데 나름 진로도 진학도 잘 준비하고 있는 것 같아요. 처음에 학원을 다 끊으라고 했더니 심하게 거부했어요. ‘내가 보기에는 중독 상태다, 그러니까 일단 끊자, 일단 끊고 한 달이든 두 달이든 시간을 둬보자, 그리고 나서도 필요한 거 같으면 그때 가자’고 설득해서 일단 모두 끊었죠. 그런데 다시 간다는 이야기를 안 하더라고요. 지금 학원 한 곳도 안 다녀요. 고3까지 이 정도로 행복하게 살았으면 됐다, 그 와중에 자기가 뭘 하면 좋을지를 계속 가다듬고 삶의 스킬도 늘렸으니까 됐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만약 방황하는 시점에 계속 압박하고 학원을 보냈으면 어쨌을까 생각하면 정말 아찔해요.”
정 사무총장은 이제 더 이상 사교육으로 각자도생할 생각을 버리고 학부모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학교의 변화를 요구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학부모들은 자기 아이가 다니는 학교와 선생님이 중요하다. ‘거꾸로 교실’은 그냥 그림의 떡이 아니라 여전히 변하지 않은 교실에 갇혀 있는 아이들의 부모들에게는 또 다른 좌절의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학교가 달라지지 않았다고 해서 아이를 믿고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방향 자체를 수정해서는 안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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