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프로배구에서 크게 논란이 된 ‘부정 유니폼’ 사건에 대해 한국배구연맹(KOVO)이 한국전력의 점수를 깎은 건 ‘잘못된 결정’이라는 전문가 의견이 나왔다.
한국전력 세터 강민웅(32)은 지난 14일 대한항공 원정에서 유니폼을 잘못 가져갔다. 숙소에서 뒤늦게 배달된 유니폼을 입고 1세트 4-1 상황에서 들어갔지만 이 유니폼은 동료들이 입은 반소매가 아닌 민소매였고 로고 위치 등도 약간 달랐다. 당시 박주점 경기감독관은 강민웅의 투입을 허락했지만 현장에 있는 경기운영위원장과 심판위원장 판단은 달랐다. 1세트 12-14 뒤진 상황에서 한국전력 강민웅은 퇴장 당했고 강민웅 투입 전 시점에 맞게 한국전력의 점수도 11점 삭제됐다. 결국 1-14로 되돌려진 상태에서 한국전력은 1세트를 8-25로 내줬고 풀 세트 접전 끝에 패했다. 경기 뒤 11점을 깎은 KOVO 조치가 옳지 않다는 주장이 나왔지만 KOVO는 지금까지도 ‘문제없다’는 입장을 고수 중이다. 그러나 엄한주(60) 아시아배구연맹(AVC) 경기위원장은 22일 본보와 전화인터뷰에서 “KOVO의 결정이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 KOVO가 잘못을 인정하고 정당한 판례를 남겨야 한다”고 밝혔다. 엄 위원장은 국제배구연맹(FIVB) 경기분과위원이기도 한 이 분야 최고 전문가다.
다음은 일문일답.
-KOVO는 11점 삭제에 대해 ‘부정 선수가 발견되면 처음 시점으로 되돌린다’는 FIVB 규정을 준용했다며 문제없다고 말한다.
“규정이나 법률은 그 분야 전문가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범주 내에서 구성되는 거다. 심판은 사실에 근거한 적시된 규정을 바탕으로 판단하는 거고 경기감독관은 적시되지 않은 정황에 대해 유권 해석하는 재량권을 갖는다. 유니폼 규정은 첫째 개인 식별, 둘째 피아(彼我) 구분, 셋째 같은 팀 내에서의 동질성 확보를 위해 존재한다. 3가지 요건이 완벽히 구비됐는지 조금 미비한 지, 완전히 어긋났는지는 상황을 보고 판단할 부분이다. 예를 들어 어떤 팀이 파란색 유니폼을 입어야 하는데 전원 붉은색을 입고 왔다 치자. 상대 팀은 흰색이다. 규정 위반이지만 위에 언급한 3가지 기준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 경우 감독관이 재량 껏 경기를 진행하면 된다. 단, 규정 위반에 대한 부분은 나중에 벌금 등으로 징계하면 되고(KOVO 규정상 유니폼 착용 위반의 경우 벌금 10만 원).”
-강민웅이 잘 못 입은 유니폼을 위의 3가지 기준에 적용해 본다면.
“첫째, 둘째는 문제없고 마지막 동질성 확보가 되지 않았다는 건데 그게 아주 부분적이지 않느냐.(강민웅의 유니폼은 동료 유니폼과 크게 다르지 않음) 예를 들어 보자. 양말도 유니폼의 일부인데 다른 선수들은 V자 무늬인데 한 선수만 X자 무늬를 신었다면 동질성에 어긋나지만 이 때문에 감독관이 경기를 하지 말라고 하면 그게 상식적인가. 감독관 역할은 양 팀이 베스트 컨디션에서 경기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운영하는 거다. 어떤 상황이 발생하든 상식적인 차원에서 원칙에 어긋나지 않게 조치하면 된다.”
-당시 경기감독관 판단을 심판위원장과 경기위원장이 번복해 11점을 깎았다. 위원장이 감독관 권한을 침해한 월권 아닌가.
“감독관이 결정권자지만 판단이 힘들 때는 위원장에게 조언을 구할 수도 있다. 또 감독관이 결정을 내렸는데 위원장이 보기에 문제 있다면 경기가 중단된 상황에서 먼저 조언도 할 수 있다. 월권이라고까지 보기는 힘들다.”
-KOVO는 이 사안을 FIVB 질의한다고 하는데.
“KOVO 경기위원장이 내 의견을 묻길래 FIVB 질의는 보류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했다. 규정이 아닌 상황적 문제를 FIVB에 질의하는 건 좀…. FIVB도 아마 국내에서 처리할 문제라며 결국 내 의견을 물을 가능성이 높다.”
-KOVO는 11점 삭제 조치가 잘못이라고 인정하면 경기에 진 한국전력이 또 이를 문제 삼을까 우려하는 것 같다.
“경기 도중 상황이 발생해 그에 대한 결정이 내려졌고 양 팀이 수긍하고 경기가 진행돼 끝났다면 그것이 적절했든 부적절했든 결과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않는 것이 국제 스포츠의 룰이다. KOVO도 잘못을 덮기보다는 처음 일어난 일이라 잘못 판단했다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나중을 위해 낫다.”
-KOVO가 경기 당일 엄 위원장에게 조언을 구했다고 하던데.
“(11점 삭제로 결론이 난 뒤에) 경기위원장이 질의 하길래 ‘현장에서 내린 결정이 조금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고만 했다. 그리고 다음날 나는 FIVB 경기위원회가 있어서 스위스로 출국했다.”
-KOVO는 엄 위원의 조언을 듣고도 계속해서 11점 삭제는 정당하다고 주장한 셈인데.
“그 입장도 이해는 한다. 바로 다음 날 잘못했다고 하기는 쉽지 않겠지.”
-잘못된 판례가 남아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설마 KOVO가 이대로 판례를 남기겠나. 잘못을 인정하고 정당한 결정을 판례로 남길 거라고 본다.”
-KOVO가 엄 위원의 의견을 듣기 위해 미팅을 요청했다고 들었다.
“토요일(25일)에 만나기로 했다. 나는 KOVO가 맞다 틀리다고 결정 내릴 입장은 아니다. 다만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하고 인정할 건 깨끗하게 인정하고 넘어가는 것이 낫다고 조언해 줄 생각이다.”
KOVO는 엄 위원장과 미팅을 마치면 도리 없이 당시 판단이 잘못됐음을 시인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FIVB 질의도 없던 일이 될 전망이다. 이번 일은 미봉책으로 슬쩍 넘어갈 사안이 아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KOVO가 ‘작비금시’(지난 잘못을 걷어내고 옳은 길로 나아가다)할 기회는 아직 남았다.
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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