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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건축가의 선택

입력
2017.02.23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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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이 이사한 후 남영역을 주로 이용하게 되었다. 전철역 플랫폼에 벽돌 건물 하나가 눈에 띈다. 세로로 난 좁은 창문과 검정색 벽돌이 인상적인데, 이곳은 과거 서슬 퍼렇던 ‘남영동 대공분실’이다. 김근태 씨가 모진 고문을 당했고, 1987년 1월 학생 박종철이 끌려가 물고문 끝에 죽임을 당했던 그곳이다. 지금은 ‘경찰청 인권보호센터’로 바뀌었다.

이 불편한 장소를 매일 아침저녁 보게 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디자인이 무척 세련되었다.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건물답다. 김수근의 그림자라고도 불린다 한다. 한국건축사에 한 획을 그었던 선배 건축가가 사람을 잡아다 고문하는 건물도 설계했다니,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프로젝트를 처음 의뢰 받았을 때 건축가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건축가는 이곳이 어떤 곳인지 어떤 프로그램으로 설계되어야 하는지 분명 알았을 것이다. 처음에야 한국의 FBI를 표방하는 방공 방첩을 위한 건물이었다고 했지만 취조실의 창과 욕조를 설계하면서도 과연 그대로 그 말을 믿었을까.

김수근 선생의 건축사무실을 상상해본다. 기본설계부터 본인이 직접 시작하지는 않았겠지. 실장이나 신입이 도면을 그리면서 일을 진행하고 가끔 확인 받는 정도였을까. 사람의 머리가 빠져 나가지 못할 정도로 폭이 좁은 창은 누구의 아이디어였을까. 고문 받던 사람이 투신하지 못하도록 좁은 창을 그리라고 말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도면에서 욕조 부분을 그리던 사람은 정말 목욕용 욕조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발주처의 요구대로 했다고 했으니 상관없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이 설계가 원활히 작동하도록 ‘스터디’도 했을까. 이 건물의 도면을 다 그리고 뿌듯했을까. 도면을 납품하고 홀가분해하며 회식을 했을까. 아니, 처음 의뢰가 왔을 때 거절했지만 서슬 퍼런 분을 거역할 수 없었던 것일까.

건축가의 ‘선택’은 얼마나 중요한가. 건축은 단순히 특정한 누구를 위한 건물이 아니라 사회를 만들고 주변 환경을 바꾸며 사회구성원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하나의 의뢰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건물이 생겨남으로써 발생하는 일들에 대해 사회적 책임까지도 다해야 하는 것이다. 건축가의 선택은 결코 개인적인 일로 끝나지는 않는다. 사회구성원으로서 건축으로 이 사회에 기여해야 하는 부분도 분명 있는 것이다.

4대강 공사가 한창이던 때, 내가 다니던 회사에 이와 관련한 일의 의뢰가 들어온 적이 있었다. 4대강 사업에 비판적이었던 나는 결코 이 일을 맡을 수가 없었다. 디자인실장으로서 선택의 기로에 섰다. 사표를 쓰겠다고 결심한 순간 일을 진행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다행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회사 오너라면, 직원에게 줄 월급이 빠듯했다면, 과연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건축설계는 수많은 ‘선택’을 해야 하는 직업이다. 일을 맡을지 말지에서부터 창을 넣을 위치를 정하거나 방을 어디에 배치해야 사람들이 편안하게 살 것인지 수많은 고민 끝에 선택을 한다. 어떤 재료를 쓸 건지, 어떤 제품을 써야 디자인과 예산에 맞는지도 선택해야 한다. 손잡이 하나 콘센트 하나가 모두 선택의 결과다. 이 선택은 즐거운 일이다. 가장 좋은 것을 찾아내기 위해 의견을 모으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좋은 선택들이 모여서 좋은 공간을 만들면 사용하는 사람들이 행복해진다.

그러나 남영역에 내려 검은 건물의 그림자 속에 내 발걸음이 닿는 순간, 쓸데없이 고퀄인 건물을 바라보면 심경이 복잡해진다. 첫 선택을 제대로 하지 못한 건물은 결국 뒤따르는 수많은 선택과 노력을 의미 없게 만들어버렸다. 건축은 먹고 살기 위해서, 시키니까 어쩔 수 없다는 말로, 때론 전혀 몰랐다는 말로 외면하고 회피한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다. 선택은 책임이라는 무거운 결과가 뒤따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잘못된 선택으로 많은 국민들이 고통 받고 있는 요즘이 아니던가.

정구원 트임건축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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