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 사망 원인을 분석 중인 말레이시아 보건당국이 시신의 신원을 확인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한국 정부가 사건 직후 피살자 신원을 김정남으로 확인해 통보했으나 사건 연루 자체를 부인하는 북측을 의식, 과학적 근거를 명확히 마련해 공정성을 담보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누르 히샴 압둘라 보건부 보건총괄국장은 21일 오후 쿠알라룸푸르 국립법의학연구소(IPFN)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김철’로 알려진 인물이 김정남이 맞는지 확인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전날 입국한 것으로 알려진 김정남 아들 김한솔(22)이 병원에 왔느냐는 질문에 “우리도 기다리고 있다”고 밝혀 이날 새벽 김한솔이 병원에서 김정남 시신을 확인했다는 보도를 부인했다. 누르 국장은 또 “(피살자가) 독극물에 의해 숨졌는지 여부는 아직 말하기 어렵다. 샘플 분석이 끝난 뒤에야 알 수 있다”고 말해 사망 원인 규명이 난항을 겪고 있음을 내비쳤다. 그는 “김정남이 심장마비를 일으켰다는 증거가 없고 시신에 외상이나 (뾰족한 것에) 찔린 흔적도 없었다”고 덧붙였다.
김정남의 사인은커녕 신원 확인까지 거부한 말레이시아 측 태도는 그간의 수사 진행 결과와 배치된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이미 피살자의 신원이 김정남이라는 사실을 확보한 상태다. 국가정보원은 피살 사건 직후 말레이시아 측으로부터 피살자의 지문조회 요청을 받고 보관 중인 김정남 지문과 대조해 일치한다는 결과를 통보했다. 아흐마드 자히드 말레이시아 부총리도 앞서 16일 “그(피살자)는 두 개의 다른 신분증을 갖고 있었다”며 여권상 신분은 위장용이고 사실상 김정남이 진짜 신분이라는 점을 확인한 바 있다.
말레이시아의 신중한 접근은 다분히 북측 반발을 의식한 조치로 해석된다. 강철 말레이시아 주재 북한 대사는 전날 기자회견을 자청해 숨진 남성의 신원을 여권에 기재된 “‘김철’ 이름의 북한 국적자”라고만 했다. 김정남은 북한의 적대 세력이 주장하는 이름일 뿐이라며 한 번도 입에 담지 않았다.
북한이 줄곧 김정남 사망을 인정하지 않은 상황에서 유전자정보(DNA) 분석 등 보다 확실한 증거를 들이 대야 공세의 빌미를 주지 않을 것이란 계산이 깔렸다고 볼 수 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누르 국장이 사망자를 ‘북한 국적 사망자’로만 지칭하고 “친족 방문을 기다리고 있다”고 밝힌 부분도 이와 무관치 않다. 김한솔의 입국설이 나도는 만큼 두 사람이 DNA 대조를 거쳐 부자관계로 판명될 경우 “사망자는 김정남이 아니다”라는 북측 주장은 설득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압둘 사마흐 마트 셀랑고르 지방경찰청장 역시 “아직 시신 인도 요청은 없었고 (접촉시) 필요한 보호조치를 제공하겠다”며 유족 참여를 촉구했다.
누르 국장은 사인 규명과 관련해서도 “풍부한 경험을 갖춘 법의학자, 병리학자가 참여했다. 단층 촬영 등 다양한 검사가 이뤄졌고 모든 과정이 국제 표준을 준수했다”며 부검 결과를 수용하지 않겠다고 공언한 북측 주장을 반박했다. 시신 샘플 정밀검사 결과는 이르면 22일 발표될 것으로 전해졌다.
쿠알라룸푸르=정민승 특파원 ms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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