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의 순간은 지나갔지만 추억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영국 BBC는 아마추어 팀 서턴 유나이티드의 위대한 여정에 이 같은 찬사를 보냈다.
서턴은 21일(한국시간) 프리미어리그 최강 아스날과 잉글랜드 FA컵 16강에서 0-2로 패했다. 서턴과 아스날은 규모와 이름값에서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아스날은 프리미어리그에서 빅4 안에 드는 세계 최고 명문 구단 중 하나다. 잉글랜드 프로축구는 프리미어리그(20팀) 아래 각각 24팀씩 있는 챔피언십(2부), 리그1(3부), 리그2(4부)가 있다. 프리미어리그부터 리그2까지가 프로다. 그 아래부터는 논-리그(non-League Football)라 불리는 일종의 세미프로다. 서턴 유나이티드는 5부에 해당하는 내셔널리그 소속이다. 선수들은 생계유지를 위해 다른 직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다반사이고 이 때문에 훈련도 1주일에 2~3번 밖에 못 한다. 외신들은 “서턴이 104개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아스날을 만날 수 있다”고 표현했다. 프리미어리그 4위인 아스날과 내셔널리그 17위인 서턴 사이에 104팀이 있다는 뜻이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서턴은 아스날에 주눅 들지 않고 맞섰지만 역부족이었다. 아스날은 전반 26분 루카스 페레스(29)의 선제골에 이어 후반 10분 시오 월컷(28)이 추가골을 터뜨렸다. 월컷은 2006년 아스날 유니폼을 입은 뒤 11년 만에 100번째 골을 터뜨렸다. 서턴은 후반 20분 로리 디콘(26)의 강력한 중거리 슛이 크로스바를 강타하면서 아쉬움을 남겼다. 디콘은 아스날 연습생 출신으로 프로에 남지 못해 방출된 이다. BBC는 “서턴의 모험은 막이 내렸지만 클럽과 선수, 스태프들은 이 순간을 영원히 아로새길 것이다”라고 평했다. 적장인 아르센 벵거(68) 아스날 감독도 “내셔널리그 팀이 이런 실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엄지를 들었다.
이날 경기 못지않게 관심을 끈 건 서턴의 홈구장 ‘더 보로우 스포츠 그라운드’(The Borough Sports Groundㆍ정식 명칭은 Gander Green Lane)였다. 1898년 문을 열어 1912년부터 축구장으로 사용된 유서 깊은 경기장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수십 년 전으로 온 듯 구시대의 유물 같은 모습이 눈길을 끈다. 5,013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작은 규모인데 이날은 당연히 매진됐다.
좌석은 본부석 맞은편 스탠드에 765개뿐이다. 보통의 경우 스탠드 좌석은 구단의 상징색으로 물들이기 마련이다. 서턴의 상징색은 호박색, 초콜릿색인데 경기장 의자 색깔은 청색과 붉은색이다. 프리미어리그 첼시로부터 기증받은 물품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세 면은 좌석이 없고 계단식 스탠드만 갖춰져 서서 응원해야 한다. 스코틀랜드의 축구 동호인 웹진인 AFTN은 “아주 잘 정리된 스타디움은 아니지만 원한다면 선수들을 바로 옆에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학교 운동장에서나 볼 법한 수동식 전광판과 비좁고 낡은 라커룸도 눈길을 끌었다.
아스날은 8강에서 또 내셔널리그 팀을 만난다. 상대는 5부 리그 이하 팀으로는 1914년 퀸즈파크레인저스 이후 103년 만에 FA컵 8강에 오른 링컨 시티 FC다. 아쉽게도 링컨 시티의 홈 구장을 구경하는 일은 없다. 8강전은 아스날의 안방인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에서 벌어진다.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은 2006년 7월 개장했으며 수용인원 6만355명, 총 건설비용이 4억3,000만 파운드(6,134억 원)에 달하는 최신식 경기장이다.
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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