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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몸에 갇힌 존재들

입력
2017.02.20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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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졸업이라는 ‘졸혼’에 관한 책을 보다가 문득 인터넷 검색 창에 ‘권태기’를 쳐봤다. 관계 상담 홍보까지는 이해가 갔지만 흑마늘 진액 글에는 실소가 터졌다. 수많은 ‘흑마늘’ 글들은 아내가 진액을 마련해 꼬박꼬박 남편을 챙겨주고 자기도 마시다 보니 결국 사랑을 되찾았다는 전개를 반복한다. 권태기는 성욕만의 문제가 아니지만 그렇다손 치더라도 그 글들에는 성욕의 주체는 남자라는 것, 쪼그라든 그의 성욕을 부풀게 할 책임은 여자에게 달려있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그래서 흑마늘은 남자에게는 정력용으로, 여자에게는 다이어트용으로 소개된다. 우리, 길 고양이한테 심정을 털어놓고 싶을 만큼 절망적이라도 인터넷에 권태기 조언은 구하지 맙시다.

어느 날 권태기를 상담해도 될 깜냥의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혹시 ‘미운 우리 새끼’라는 방송 봤어? 거기서 허지웅이 성욕 없다고 남성호르몬 검사하거든. 검사결과 허지웅 남성호르몬 수치가 낮아서 최고로 높은 신동엽에 비교되면서 엄청 놀림감이 되고 말아. 결국 남성호르몬 걱정돼서 ‘햇반’ 생활 청산한다며 집에 가스레인지를 들여. 근데 만약 방송 패널이 여자였다면? 강수지가 요즘 성욕이 안 느껴져. 하고 성호르몬 수치 걱정하니까 박나래가 난 수치 폭발인데! 이렇게 장단 넣고, 상상이 가냐?” 물론 상상이 안 된다.

남성호르몬은 성욕을 떠올리게 하지만 여성호르몬은 갱년기 처방약을 연상시킨다. ‘욕망하는 여자’는 흥분할 때 높아지는 질 내 혈류량을 측정하는 최첨단 기계를 통해 여자가 성욕의 주체가 아니라는 ‘상식’을 과학적으로 깨부순다. 남자가 동물이라면 여자도 똑같은 동물이다. 다만 남자는 평소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다가 성적으로만 충동적이고 제어가 안 되는 동물이고, 여자는 평소 감성적이고 감정적이다가 성적으로만 보수적이고 이성적인 인간이다. 술 먹은 남자가 저지른 성폭력은 음주운전 가중처벌과는 반대로 충동적이고 본능적으로 여겨져서 종종 감형된다. 반대로 여성의 성욕에 대한 연구들이 최첨단 기계로 무장한 까닭은 남자와 달리 여자는 몸이 말하는 대로 정신이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사회적 관습과 의무 때문에 암컷 원숭이가 자연스레 따르는 욕망마저 인간 암컷들은 빈번하게 억누르고 심지어 스스로 인지조차 못한다고 말한다. 지금은 2017년이지만 여전히 여성은 몸에 갇힌 존재다.

최근 말 그대로 몸에 갇힌 존재가 나오는 동영상을 보았다. 2001년부터 그들은 떼로 뭉쳐 버스와 지하철 선로에 쇠사슬로 몸을 묶고 대로의 횡단보도에 드러누웠다. 올해 설에는 출발하는 고속버스를 막아서기도 했다. 경찰은 “시민들이 용납하지 못할 불법행위”라며 그들을 끌어냈다. 바로 ‘장애인 이동권 투쟁’에 나선 사람들이다. 당시 “지하철 역과 버스가 한두 개도 아닌데 한 줌의 장애인을 위해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는 여론이 높았었다. 현재 지하철 엘리베이터와 저상버스를 가장 많이 이용하는 승객은 어르신, 아프거나 다친 사람, 유모차, 짐을 든 사람들이다. 누구든 삶의 한 시점에는 몸에 갇히는 존재가 되므로, 우리 모두 ‘불법행위’에 빚지고 있는 셈이다. 어쩌면 존재를 가둔 것은 몸이라기보다는 사회가 아닐까.

몸에 갇힌 존재가 사회에 갇힌 존재로 전환되는 순간 몸은 자아를 벗어나 타인과 사회와 연대하는 플랫폼이 된다. 마치 어떤 고통들이 그러하듯. 신체라는 공유할 수 없는 외로운 물리적 세계를 빠져 나와 다른 생명의 목소리와 감정을 자기화하는 것, 나는 그것이 희망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더 많이, 더 깊게 몸에 갇힌 존재들이 자기를 드러내기를 바란다. 이란에서 지신을 성폭행하려는 남자를 살해한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은 여성을 위해 전세계 여성들이 이란 대사관 앞에서 맨 가슴을 드러내고 ‘피멘(Femen)’ 시위를 했듯이 말이다.

고금숙 여성환경연대 환경건강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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