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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족보와 고대사… ‘판타지’는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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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족보와 고대사… ‘판타지’는 그만

입력
2017.02.13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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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서울 대한문 앞에서 보수단체 회원들의 탄핵무효 집회를 열면서 성조기와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지난 12일 서울 대한문 앞에서 보수단체 회원들의 탄핵무효 집회를 열면서 성조기와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어릴 적 나의 천국이자 지옥은 ‘아카데미 과학’이었다. 부산의 번화가 서면 한 귀퉁이에 있던 프라모델(조립모형) 직영점. 설날이 ‘민속의 날’이라 불리기도 한 시절, 간혹 살랑 분 봄바람에 희미한 최루탄 냄새가 섞여와 곤욕을 치를 때도 있었지만 온갖 프라모델이 다 있었으니 천국이었다. 주머니는 늘 비어 있어 지옥이기도 했다.

그러니 설날, 그 얼마나 기다렸겠나. 저 지갑에서 얼마가 나올까. ‘매의 눈’을 지닌 어머니의 감시를 피해 얼마를 챙길 수 있을까. 일년 내내 점지해놓은 것 가운데 무엇을 살 수 있을까. 세배 뒤 잠시 꿇어앉은 그 짧은 시간, 머리 속 계산은 꽤나 복잡했더랬다.

간혹 잘못 걸려들 때가 있었으니, 기나긴 말씀에 붙잡혔을 때다. 몇 가지 버전이 있었지만 얼개는 비슷했다. 무슨 난이 일어났고, 몇 대조 할아버지가 어떤 공을 세웠고, 그 공에 감동한 대왕이 손을 꼭 잡으며 눈물을 흘렸고…. 상세한 디테일은 낯간지러우니 생략.

자부심 가지고 열심히 살라는 좋은 뜻이셨을 게다. 그 마음 감사하지만 ‘아카데미 과학’에 빠져 혼이 비정상이었던 내 귀엔 들어올 리 없었다. 다만 뼈대 얇아 뵈는 우리 집이 이 정도면, 뼈대 좀 있다는 친구 집에선 무슨 엄청난 이야기가 오갈까 궁금했다. 한층 더 길고, 지루한 스토리일 것 같아 차마 묻진 않았다. 가끔 그런 훌륭한 조상 밑에서 우린 왜 지금 이렇게 살고 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아카데미 과학’은커녕, 매 타작 요란할 게 뻔해 그 또한 차마 묻진 못했다.

그래서일 게다. ‘중앙권력에서 소외된 영남 남인의 판타지.’ 이 문구를 접하곤 그만 웃음이 ‘빵’ 터진 것은. 역사학자 이덕일이 조선 후기의 왕들이 독살당했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노론은 닌자를 능가하는 사상 최대 암살집단”이라는 농담이 나돌던 때였다. 독살설의 대표격인 ‘정조 독살설’을 정병설 서울대 교수 등이 작심하고 비판하던 시기였다. 논쟁과는 별도로, 독살설은 왜 인기가 있었을까. 그에 대한 오항녕 전주대 교수의 촌평으로 기억한다. ‘권력, 소외 그리고 판타지’라고.

생각해보면 그럴 만하다. 씁쓸했을 것이다.‘서울’ 아니 ‘강남’공화국인 요즘도 그런데 모든 권력이 한양 문벌가에 집중된 ‘경화세족’ 왕국 땐 어땠을까. 더구나 당시는 벼슬 한 자리 하는 것 외엔 달리 할 만한 일도 없었을 터이니 말이다. 꼿꼿한 영감님들의 한숨은 나날이 깊어졌을 테고, 가부장적- 왕조적 사고방식은 현상타파보다 판타지를 택하게 했을 것이다.

“아, 가여운 우리 고운 님. 이 한 몸 불러 주시오면, 님을 둘러싼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태평성대를 만들 터인데. 아 우리 고운 님이시여!” 이런 망탈리테(집단 무의식)는 요즘도 성조기, 태극기 크게 휘날리시는 분들에게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집안, 민족, 국가를 들먹이는 건 이제 정도껏 하자. 집안, 민족, 국가의 위대함이 왜소한 자신을 곧추 세워주는 건 아니다. 작게는 족보, 크게는 찬란한 고대사의 영광은 뒤로 물리고 그 자리를 한 사람의 ‘나’로 채워보자.

올바르고 자랑스러워야 할 역사는 가문의, 민족의, 나라의 역사가 아니라 ‘나의 역사’여야 한다. 집안이, 민족이, 나라가 지지리 궁상 좀 떨었다 한들 어떤가. ‘나의 역사’가 알차다면. 그리하여 아이들에게 ‘나는 이리 살았다, 폼 나진 않더라도 부끄럽진 않았다’라고 자분자분 말해줄 수 있다면. 가문, 민족, 나라를 핑계 삼아 소중한 나의 역사를 망치는 일, 얼마나 많이 봐왔던가.

아침 먹는데 ‘딩동’하고 족보 제작비 내라는 문자가 왔다. 액수가 제법인 걸 보아 호화장정인가 보다. 버틸까 했건만 문자만 세 번째다. 얌전히 입금해야겠다. 문 열고 나서니 바람이 누그러졌다. 심술 많던 늙은 겨울도 그만 물러갈 때가 된 것 같다.

조태성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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