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측 처음부터 ‘탄핵 지연 전략’세워
극우보수 세력 결집시켜 프레임 전환 시도
극단적 ‘권력중독’ 벗고 자기반성부터 해야
전쟁에서 병참선(보급로)은 승패를 좌우하는 핵심 요소다. 식량과 물자 보급이 원활하지 않으면 전투가 장기화할수록 공격자보다는 방어자에게 유리한 환경이 조성된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실패나 북아프리카에서 롬멜의 가장 큰 괴로움도 끝없이 늘어진 병참선이 주요인이었다.
박근혜 대통령 측 손범규 변호사가 탄핵심판을 ‘전투’에 비유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은 정곡을 찔렀다. 그는 “공격자의 초기 우세는 병참선이 길어지면서 방어자의 힘과 균형을 이루고 결국에는 역습이 이뤄진다”는 군사학 이론을 현 탄핵국면에 비유했다. 탄핵심판이 장기화하자 ‘애국시민들’의 결집력이 커져 박 대통령이 수세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손 변호사로서는 기쁨에 겨운 나머지 글을 띄웠겠지만 박 대통령 측의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낸 셈이 됐다.
박 대통령은 탄핵소추안 가결 이후 일방적으로 밀리기만 했다. 수백만 촛불의 함성과 분노 앞에 그가 할 수 있는 건 몸을 한껏 웅크리는 것뿐이었다. 대통령의 명줄을 쥔 헌법재판소는 신속한 재판을 강조하며 속도를 올렸고, 특검도 박 대통령의 수족을 거침없이 쳐내며 질주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탄핵국면 이전까지만 해도 자신에 대항하는 정적을 잇따라 제거하며 ‘레임덕 없는’ 권력을 유지했던 그다. 타고난 정치력과 동물적 본능으로 아무리 불리한 판세도 순식간에 뒤집곤 했다. 더구나 그에게는 콘크리트처럼 단단한 열성 지지층이 존재했다. 탄핵사태 이후 그 중 절반은 환멸을 느끼고 이탈했지만 박근혜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나머지 15%는 더욱 강고해졌다.
박 대통령은 결국 시간은 자기편이라고 판단했다. 모든 혁명에는 반동이 뒤따르듯이 촛불이 언젠가 수그러들 것이라고 확신했다. 3월 13일만 넘겨 ‘7인 재판관 체제’가 되면 승산이 있다고 봤다. 손 변호사가 말한 ‘병참선 신장의 원리’를 대응 전략으로 정한 것도 그즈음일 것이다. 그러려면 헌재의 탄핵심판과 특검 수사를 무력화하는 게 급선무였다. 무더기 증인 신청, 증인 불출석, 증거 채택 거부, 공정성 시비 부각, 조사 기피 등 쓸 수 있는 카드를 총동원했다.
그의 장기인 프레임 전환도 병행했다. 박 대통령은 새해 첫날의 기자간담회와 보수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국면을 빠르게 전환시켰다. “눈 날리고 추운 날씨에 고생을 무릅쓰고 나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시다”며 극우보수 세력의 집회를 선동했다. 그 결과 박근혜 대 헌법과 민주주의라는 프레임을 보수 대 종북 세력 간의 대결로 보이게 만들었다. 극우보수 세력은 탄핵소추를 박 대통령을 사지로 몰아넣기 위한 특정세력의 음모라고 규정한다. 드러난 ‘팩트’는 조작과 왜곡이고 언론보도와 검찰ㆍ특검 수사 역시 거짓이라고 믿는다.
박 대통령은 탄핵소추 가결 두 달 만에 자신이 바라던 대로 구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던 탄핵 기류는 묘하게 달라지고 있다. 헌재의 탄핵심판 속도는 박한철 소장 퇴임 이후 현저히 떨어졌다. 특검은 칼자루를 쥐고서도 청와대 압수수색과 대통령 대면조사 거부에 속수무책이다. ‘탄핵기각설’과 ‘탄핵연기설’이 괜히 떠도는 게 아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다. “태극기 바람에 촛불이 꺼졌다”는 건 착각에 불과하다. 여전히 국민 절대 다수는 박 대통령의 탄핵에 찬성하고 있다. 지난주 말에도 올 들어 최대인 80만명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달려 나왔다.
박 대통령은 극단적 권력중독자다. 미국 심리학자 데이비드 와이너가 저서 ‘권력중독자’에서 언급한 대로 “지배력과 지위에 대한 욕구를 그 자신의 본능에 새겨진 비뚤어진 시각으로 바라보며, 그래서 이성적 주장이나 설득이 받아들여질 여지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국가를 병들게 하고 국민을 집단 우울증에 빠지게 했으면 최소한의 자기 반성을 하는 게 도리다. 박 대통령은 아무리 봐도 지도자감이 아니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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