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귀가 때마다 아파트 비상구 살펴
“증언 나선 국정농단 관련자들
공범이지 제보자 아니다” 지적도
#2
어떤 계기로 폭로하느냐보다
공익적 효과에 주목해야
최소한의 신분 보장ㆍ보호 필요
“언론에 폭로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최순실씨가 두려웠어요. 이 정도 힘을 가진 사람을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지금은 국민의 관심이 집중돼 있고 수사기관과 언론도 주목하고 있지만 세상에서 잊혀진 후에는 어떡하죠?”
최순실(61ㆍ구속기소)씨가 실질적으로 운영한 K스포츠재단 과장으로서 대기업들로부터 거액을 지원받은 과정에 참여했고 이를 언론에 밝힌 박헌영(39)씨. 8일 밤 서울 강남구 K스포츠재단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요즘 귀가할 때마다 아파트 현관 비상구를 살핀다고 했다. 혹시나 누가 숨어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지금이야 (구속기소된 최씨가) 제게 눈을 돌릴 여유가 없겠지만 때가 오면 분명히 가만두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한테 잘못했던 놈들’이라고 꼽으며 나쁜 마음을 먹지나 않을까 불안하죠.”
그는 지난해 12월 박지만(59) EG 회장의 비서 주모(45)씨 사망이 두려움을 촉발시킨 또 하나의 계기였다고 말했다. 경찰은 조사 끝에 자연사로 결론 내렸지만 공교롭게도 사망 시점이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2011년 박근혜 대통령 5촌 조카들 사이의 살인사건에 대한 의혹을 제기한 직후여서, SBS 취재에 협조한 주씨가 모종의 권력기관에 의해 살해된 것 아니냐는 뜬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그는 “(주씨 사망이) 우연이라고 믿지만 박헌영이라는 이름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희미해졌을 때 위험한 상황을 마주할까 걱정된다”며 “지금보다 몇 년 후의 상황이 더 두렵다”고 호소했다.
최씨의 국정농단을 폭로한 이들이 이제 신변위협과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최씨의 최측근이었던 고영태(41) 전 더블루K 이사는 한동안 잠적하며 대중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고씨는 지난해 12월 7일 국정조사 청문회 출석 후 종적을 감췄고, 지난달 13일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에서 주진우 시사인 기자가 “고씨가 ‘누군가 내 주변에서 서성이고 따라다닌다’고 말했다”고 전하면서 고씨의 신변에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니냐는 추측이 난무했다.
최씨의 이복오빠인 최재석씨는 작년 12월 29일 박영수 특별검사팀에 아버지 최태민씨의 재산자료를 제출한 뒤 불안에 시달려야 했다. 최재석씨는 12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특검 조사를 받고 돌아오는 길부터 미행에 시달렸다”며 “(집으로 가는) 시골길에 검은색 세단이 30분 이상 따라왔다. 불안한 마음에 집 안팎에 폐쇄회로(CC)TV를 13대 설치했다”고 말했다.
최씨가 ‘차은택(48) 전 창조경제추진단장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라’고 말한 대화 녹음파일 등을 폭로했던 이성한(46) 전 미르재단 사무총장 역시 심각한 불안증세를 보이고 있다. 그는 “밀림의 사자(최씨)가 생쥐(나)를 누르고 있으면 그 소리는 밖으로 들리지 않는다”는 비유로 고립무원인 자신의 처지를 털어놨다. 그는 미르재단이 언론에 조명된 작년 9월 이후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지난 6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최씨와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의 공판에 출석했다.
‘최순실 게이트’ 관련자들이 최씨의 비위에 대해 폭로한 것을 두고, 정의 실현을 위해 용기를 낸 공익제보자와는 다르다는 시각도 없지 않다. 이들 역시 정권을 등에 업고 기업들로부터 거액을 뜯어낸 최씨와 ‘공범’이라는 것이다. 뒤늦게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최씨와의 관계가 소원해지면서, 또 자신의 이익을 위해 폭로에 나섰다는 해석도 나온다. 박 과장은 이에 대해 “그런 비난을 피해갈 수 없다”고 인정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조금이라도 그 빚을 갚기 위한 것”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그러다 보니 신념과 원칙을 지키기 위해 희생을 감수한 공익제보자와 똑 같이 이들을 지원하고 보호해야 하느냐는 논란도 있다. 실제로 고씨는 최씨와 내연관계가 아니냐는 관심이 집중되고 K스포츠재단을 장악하려는 했다는 녹취록이 공개되는 등 적지 않은 시달림을 당하고 있다. 이에 대해 2003년 적십자사 혈액부실관리 실태를 제보했던 김용환 공익제보자와함께하는모임 대표는 “제보자들을 무조건 영웅화할 필요는 없지만, 그들의 증언이 공익에 기여하는 바를 생각해 최소한의 신분보장과 신변보호는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제보자 입장에선 제보 후 겪는 다양한 유ㆍ무형의 불이익이 모두 깊은 상처로 남는다. 사람들이 발언자의 개인신변과 발언 계기에만 몰두하는 경향도 강하다”고 지적한다. 제보자들이 어떤 개인적 이력을 가졌고, 어떤 계기로 폭로에 이르렀는가 하는 것보다 제보의 내용이 갖는 공익적 효과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최순실 게이트처럼 나라 전체를 뒤흔든 대형 사건의 제보자들은 더욱 큰 유명세를 치르게 마련이다. 내부고발자는 몸 담았던 조직 내부의 시각에선 ‘배신자’로 낙인 찍혀 이후 일자리를 잡기도 어렵다. 박 과장은 “(최씨가) 시키는 일을 했지만 잘못이라 생각해 제보를 한 건데, 월급 주는 사람 입장에선 ‘저런 사람을 들였다가 또 어디에 제보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며 “앞으로 뭘 해서 먹고 살지 걱정된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정치적으로 사건을 이용하고 끝날 것이 아니라 제보자에 대한 지원을 고민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재현 기자 remak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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