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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딸을 살해한 부모가 됐다…

입력
2017.02.11 0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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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챔버레인은 1980년 가족여행 도중 생후 9주 된 아이를 잃고, 아내 린디마저 영아살해 혐의로 투옥되는 시련을 겪었다. 수년 뒤 누명은 벗었지만 부부는 이혼했고, 30여년이 지나 사건의 진상이 밝혀졌지만 둘 사이의 앙금 특히 린디의 마이클에 대한 영문모를 원망은 씻기지 않았다. 그의 험한 운명은 취약한 일상의 평온과 더불어 인간 존재와 제도등 문명의 근본에 ㄷ한 몇 가지 우울한 질문들을 환기시킨다. 야후 뉴스 'sunday night' 영상.
마이클 챔버레인은 1980년 가족여행 도중 생후 9주 된 아이를 잃고, 아내 린디마저 영아살해 혐의로 투옥되는 시련을 겪었다. 수년 뒤 누명은 벗었지만 부부는 이혼했고, 30여년이 지나 사건의 진상이 밝혀졌지만 둘 사이의 앙금 특히 린디의 마이클에 대한 영문모를 원망은 씻기지 않았다. 그의 험한 운명은 취약한 일상의 평온과 더불어 인간 존재와 제도등 문명의 근본에 ㄷ한 몇 가지 우울한 질문들을 환기시킨다. 야후 뉴스 'sunday night' 영상.

-결혼 10주년 여행의 비극

두 아들ㆍ생후 9주된 딸과

호주 바위사막지대서 캠핑

잠들어 눕힌 딸 10분만에

비명ㆍ핏자국 남기고 사라져

호주에 살던 마이클(Michael)과 린디 챔버레인(Lindy Chamberlain) 부부는 결혼 10주년을 맞아 1980년 8월 13일 가족 여행을 떠났다. 69년 결혼했으니 지각 여행이었지만 아내가 우선 몸을 풀어야 했고, 대신 그 덕에 6살(Aidan)과 4살(Reagan) 두 아들 외에 생후 9주 된 딸 앗사리아(Azaria)도 함께할 수 있었다. 차에 캠핑장비를 싣고 호주 중서부 바위 사막지대를 여행하던 그들은 17일 저녁, 지금은 울룰루(Uluru)-카타추타 국립공원’이 된 노던 준주 남부 에어즈락(Ayers Rock) 캠프 그라운드에 자리를 잡았다. 바비큐 파티를 즐기던 린디가 잠든 앗사리아를 눕히러 잠깐 텐트에 다녀오고 채 10분이 안 돼 캠퍼들은 아이의 비명을 듣고 우르르 텐트로 달려갔다. 아이가 누웠던 자리에는 핏자국과 호주 들개 ‘딩고(Dingo)’의 발자국만 남아 있었다. 캠핑장은 충격에 휩싸였다. 수백 명이 인간 띠를 이뤄 주변을 수색했지만 아이는 흔적조차 없었다.

경찰 현장 조사와 대대적인 수색이 시작됐다. 증언은 대체로 일치했다. 캠핑 사이트 인근에서 딩고들이 심심찮게 목격됐고, 빵 부스러기를 던져주며 장난을 치기도 했다는 증언, 마이클이 낮시간 아들들을 데리고 클라이밍을 즐기던 사이 앗사리아를 안고 산책하던 린디는 마치 아이를 노리는 듯 따라 다니던 딩고를 보기도 했다고 진술했다. 사건 시점, 즉 아이의 비명을 듣던 순간 부부와 함께 있었다는 알리바이 증언도 물론 수두룩했다. 참담하지만, 비극은 그렇게 종결되는 듯했다.

조사 과정에 의혹이 제기됐다. 우선 딩고가 캠핑 사이트의 사람들을 공격한 예가 없었다. 영아라지만 4.5kg이 넘는 아이를, 들개라지만 그래도 개 주제에 그렇게 순식간에 물고 사라질 수는 없다고 그들은 의심했다. 사건 일주일 뒤 현장에서 꽤 먼 장소에서 핏자국이 묻은 아이의 기저귀와 잠옷이 발견됐지만, 그건 린디가 진술한 것과 달랐다. 옷감이 찢긴 게 과연 짐승 짓인지 확인하기 위해 같은 재질의 옷감에 고기를 싸서 딩고에게 던져주는 실험도 했고, 사고현장 주변 딩고들을 보이는 대로 포획해 위장을 검사하기도 했다.

실험들 자체가 의심을 반영한 거였다. 사고는 점차 ‘사건’으로, 살인사건으로 바뀌어갔다. 짐승 이빨로는 옷감이 그렇게 찢기지 않는다, 린디가 아이에게 입혔다는 옷은 어디 있는가, 아이의 시신을 훼손한 건 딩고일지 모르지만 그 전에 아이를 살해해 유기한 건 사람이다, 옷에 묻은 혈흔은 짐승 이빨이 아니라 날카로운 흉기 예컨대 부부의 카메라가방에서 발견된 가위 같은 것으로 목을 베었을 때의 흔적과 유사하다…. 믿기지 않지만 저 모든 판단들이 저명한 법의학자와 검시관, 동물학자 등이 내린 ‘전문적인’ 결론이었다.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당연히 챔버레인 부부, 특히 린디였다. 신문과 방송에 비친 린디의 모습과 표정이 아이를 잃은 부모라 여겨지지 않을 만큼 침착하고 당당하다는 것도 대중의 의심을 증폭시켰고, 갓난 아이를 데리고 거친 캠핑 여행을 떠나는 것 자체를 납득하지 못하는 모성(母性)의 성토도 있었다. 사고 직후 캠퍼들의 수색에 아버지 마이클이 동참하지 않고 금세 체념한 것도 사전에 뭔가를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의심을 샀다. 무엇보다 부부를 궁지에 몬 것은 마이클이 주류 기독교단이 이단으로 치던 ‘제7안식일 예수재림교회(Seventh-day Adventist Church)’ 목사라는 사실이었다. 종교적 희생제의의 제물로 아이를 살해했다는 풍문이 돌기 시작했고, 언론은 그 소문을 보도하며 여론의 악의를 증폭시켰다. 심지어 아이의 이름 ‘Azaria’가 헤브루어로 ‘야생의 제물(sacrifice in the wilderness)’이라는 의미라는 말도 있었다. 실제는 ‘신의 축복을 받은 아이(blessed of God)’라는 의미였다. 연결고리의 마지막 한 조각, 범행 동기가 그렇게 만들어졌다. 린디는 그 무렵 자신이 빠져나올 수 없는 덫에 걸린 것 같았다고 말했다. “내가 웃기라도 하면 딸의 죽음을 하찮게 여기는 게 됐고, 내가 울면 연기를 한다고 말했다.”(NYT, 2014.11.16)

1982년 9월 재판을 받던 때의 린디(왼쪽)와 마이클 챔버레인. 임신중이던 린디는 종신형을 선고 받고 그 해 말 감방에서 딸을 출산했다. 위 동영상.
1982년 9월 재판을 받던 때의 린디(왼쪽)와 마이클 챔버레인. 임신중이던 린디는 종신형을 선고 받고 그 해 말 감방에서 딸을 출산했다. 위 동영상.

-母 종신형 父 집유 선고

제물로 바쳤다는 소문 퍼지고

언론들은 여과없이 보도

소수종교ㆍ피해자에 대한 편견

들개 소행 드러나 3년뒤 석방

일상 회복 못하고 부부 이혼

부부는 살인 혐의로 기소됐고, 82년 9월 13일 노던 준주 다윈 법원에서 배심원 재판이 열렸다. 캠퍼들의 목격담 등 진술은 대부분 챔버레인 부부의 무죄를 입증할 만한 내용이었지만, 엇갈리는 증언도 없지는 않았다. 사고 직후 마이클이 ‘딩고가 아이를 물고 갔고, 아마 지금쯤 아이는 숨졌을 것’이라고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는 증언, 린디 역시 ‘무슨 일이 일어났든 모두 신의 뜻’이라고 말하더라는 증언. 또 부부가 약 15~20분 가량 숲 속을 단 둘이 배회했다는 진술도 있었다. 그 증언은 부부가 아이를 미리 살해했다가 유기한 정황 증거가 됐다. 법의학자 등 전문가들의 의견은 대체로 챔벌레인 부부에게 불리했다. 영국서 온 한 법의학자는 아이의 옷에서 딩고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고, 직물 전문가 역시 옷이 찢긴 건 짐승의 이빨이 아니라 흉기에 의한 것이라고 밝혔다. 재판정 바깥에서는 동물 보호단체 회원들이 ‘딩고는 결백하다’는 문구를 새긴 옷을 입고 시위를 벌였다.(가디언, 2012.6.12) 10월 29일 법원은 린디에게 종신형을, 마이클에게는 범죄를 도운 혐의로 18개월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만삭의 린디는 보석을 신청했으나 기각 당했고, 두 달 뒤 베리마(Berrimah) 교도소에서 딸(kahlia)을 출산했다.

재판에 대한 비판, 법의학적 증거들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는 보도도 물론 있었다. 린디 석방운동에는 약 10만 명이 서명했다. 재판 과정에서 주요 범행물증으로 제시된 챔블레인 부부의 차량 혈흔이 피가 아니라 페인트 유화도료라는 사실도 뒤늦게 밝혀졌다. 여론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한 설문조사에서는 시민 52%가 린디의 유죄를 믿는다고 답변했다.

마이클은 아이들을 보살피며 린디의 옥바라지를 했다. 주민들이 가하는 모욕과 비난도 온전히 그의 몫이었다.(시드니모닝헤럴드, 17.1.10) 그는 더 이상 목회 일을 할 수 없어 교회 기록물보관소에서 일했고, 린디가 딸을 출산한 직후 앤드류대학에서 인문석사 학위를 받았다. 훗날 그는 주정부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으로 공부에 몰두했노라고 말했다.

86년 1월 한 영국인 여행자가 에어즈락 등반 도중 실종됐다. 8일 뒤 그의 유해 일부가 딩고 서식지 주변에서 발견됐다. 인근에서 아이의 흰색 외투도 함께 발견됐다. 린디가 말한 앗사리아의 옷이었다. 주정부는 86년 2월 7일 재판무효를 선언하며 수감된 지 3년여 만에 린디를 석방했다. 다시 재판이 열렸고, 88년 9월 15일, 법원은 부부의 무죄를 선고했다. 2년 뒤 린디는 130만 달러의 보상금을 받았고, 그 해 수기 ‘Through My Eyes’를 출간했다. 앞서 85년 작가 존 브라이슨(John Bryson)이 검찰의 증거훼손 등 수사의 허점을 폭로한 소설 형식의 책 ‘Evil Angels’를 출간했고, 88년 메릴 스트립 주연의 영화 ‘A Cry in the Dark’도 개봉됐다.

린디 챔버레인의 91년 자서전 'Through My Eyes' 표지. 책에서 그는 전 남편 마이클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린디 챔버레인의 91년 자서전 'Through My Eyes' 표지. 책에서 그는 전 남편 마이클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호주 사법정의시스템의 실패는 수사당국의 의도적인 증거조작이나 증인들의 왜곡된 기억, 위증 탓이 아니었다. 소수종교에 대한 병적인 편견, 딸을 잃은 피해자라면 늘 탈진한 듯 비탄에 젖어 있어야 한다는 가학적 선입견, 그 편견들을 증폭시키는 데 앞장 선 언론의 무모하고 선정적인 보도 관행, 법적 정의를 보완해야 할 전문가들의 그릇된, 과도한 확신이 그들 부부를 도살장으로 몰았다.

아이를 잃고, 누명을 쓰고. 이웃들의 비난 속에 재판을 받고, 실형을 선고 받고, 끝내 한 사람은 투옥되고 또 한 사람은 어린 아이들을 키우는 동안, 부부에게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고통 속에 무엇이 망가지고 뒤틀렸는지 속속들이 알 길은 없다. 그들은 독실한 신앙인이었고, 시련 역시 신의 뜻이라 여겨 속으로 삭여보려 했을지 모른다. 참혹한 상실을 애도할 새도 없이 세상 앞에 나서서 스스로의 결백을 호소하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분노와 절망과 속절없는 체념을 반복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 사이사이 서로의 어떤 말과 표정과 행동이 상대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을 수도 있다. 종신형을 선고 받은 린디에게 그 고통이 훨씬 심했던 듯하다. 린디의 책에는 마이클에 대한 내용이 거의 없었고, 좋은 말은 더 없었다. 부부는 91년 6월 이혼했고, 이듬해 린디는 미국인(Rick Crighton)과, 마이클은 3년 뒤 세 아이의 어머니였던 잉그리드 버그너(Ingrid Bergner)와 각각 재혼했다.

그렇게 헤어져 각자의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도 앗사리아의 죽음에 대한 진상 조사는 이어졌다. 검찰의 최종 조사보고서가 발표된 건 사고가 난 지 32년 만인 2012년 6월 12일이었다. 검찰은 아이의 죽음은 100% 딩고의 소행이라고 결론짓고, 마이클과 린디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과학수사처 토니 존스 박사는 “과학자는 결코 지나치게 모험적(adventurous)이어서도 안 되며 지나치게 경쟁적(competitive)이어서도 안 된다. 문제는 우리 모두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인간의 취약함이 이토록 참혹한 결과를 낳은 예를 보지 못했다”고 덧붙였다.(law2.umkc.edu)

하지만 린디를 가장 분노하게 한 것은 주 경찰도 언론도 이웃도 유죄를 평결한 배심원단도 아닌, 전 남편 마이클이었다. 2016년 7월 인터뷰에서 그는 마이클에 대한 “쓰디쓴 분노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그 긴 세월 동안 싸워왔노라”고 말했다. “분노에 젖어 사는 건 누구에게도 상처 입히지 못하며, 오히려 분노의 대상만 살판나게 할 뿐이다.” 그 삭지 않은 분노를 고백하면서도 그는 분노의 이유에 대해서는 ‘사적인 문제’라며 끝내 밝히지 않았다.(news.com.au, 2016.7.20) 그 무렵 마이클은 2011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전신이 마비된 아내 버그너를 24시간 간호하며 지내고 있었다. 그는 전처의 느닷없는 분노가 당혹스럽다고 말했다. “린디는 단 한 번도 내게 그 이유를 말한 적이 없다. 지금이라도 말해주면 좋겠다.(…) 나는 린디가 선택한 삶을 존중하며 그가 행복하기를 바랄 뿐이다.”

사소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을 린디의 마이클에 대한 분노, 혹은 분노하지 않기 위한 분투는 지난 1월 9일 마이클이 급성백혈병으로 별세(향년 72세)하면서 과녁을 잃었다.

마이클과 잉그리드 버그너 부부와 일가의 한때. 버그너는 2011년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마이클은 24시간 그를 간병했다. 잉그리드 버그너 페이스북.
마이클과 잉그리드 버그너 부부와 일가의 한때. 버그너는 2011년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마이클은 24시간 그를 간병했다. 잉그리드 버그너 페이스북.

마이클 챔버레인은 1944년 2월 27일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의 한 침례교 집안에서 태어나 어머니의 영향으로 제7안식일 예수재림교회(SDA) 신앙으로 개종했다. 65년 호주로 건너와 SDA의 애번데일칼리지에서 신학을 전공했고, 68년 역시 뉴질랜드 출신 린디를 만나 69년 결혼했다. 린디가 간절히 바라던 딸 앗사리아를 얻던 무렵 마이클은 호주 퀸스랜드의 마운트 아이자(Mount Isa)의 목회자로서 ‘선한 삶 The Good Life’이라는 라디오 신앙 프로그램을 맡아 진행하고 있었다. 그들 부부는 무척 단란했다고 한다.

이혼과 재혼 후 챔버레인은 뉴캐슬대에서 교육철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애번데일 칼리지에서 교육학 학위를 별도로 딴 뒤 2008년 은퇴할 때까지 교사 및 뉴캐슬대 겸임교수로 일했다. 그는 자신의 사연을 기록한 ‘Heart of Stone: Justice for Azaria’ 등 4권의 책을 썼다. 2012년 검찰의 최종 보고서 발표 직후 그는 “다만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누구나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해도 끝내 정의는 우리의 편이라는 사실”(가디언, 17.1.9)이라고 말했다. 그도 그렇게, 분노를 삭이지 못해 고통스러워한 전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고, 용서도 정의도 얻지 못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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