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 대변인 비꼰 SNL
22년 만에 최고 시청률 기록
설화 잦아 소재도 무궁무진
풍자가 이젠 분노표출 넘어
트럼프와 싸울 무기로 변해
정권 타격 줄 수단 획득한 셈
“진정해, 진정하라고! 언론이랑 좀 거칠게 시작한 걸 나도 안다고!”
말쑥한 정장 차림에 가르마를 단정하게 탄 중년 남성이 등장하자마자 다짜고짜 기자들을 향해 소리친다. 그러더니 껌 한 통을 입 속에 털어 넣고 질겅질겅 씹는가 하면, 질문에 앞뒤가 안 맞는 답변을 하면서도 오히려 기자를 몰아 세운다. 심지어 맘에 안드는 기자에게 “대들지 마라. 구석에 가둬 버리겠다”는 협박도 서슴지 않는다.
막말을 퍼부은 주인공은 숀 스파이서 미국 백악관 대변인. 물론 실제 상황은 아니다. 스파이서 대변인의 강압적 언론관을 비꼰 인기 TV 오락프로그램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SNL)’의 한 장면이다. 5일(현지시간) 방영분에서 영화 ‘스파이’로 세계적 흥행을 거둔 여배우 멜리사 맥카시는 오만과 아집으로 똘똘 뭉친 스파이서의 특징을 정확히 짚어냈다. 살아 있는 권력에 칼을 들이대는, 풍자의 미학을 제대로 선보인 덕분인지 8분 분량인 영상은 대박을 터뜨렸다. “누가 스파이서이고 맥카시인지 구분이 안된다”는 찬사가 쏟아졌다. 1994~95 시즌 이후 22년 만에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는 통계도 나왔다.
미국사회에 ‘정치풍자’가 만개했다. 정치권력을 꼬집는 미국의 풍자문화는 새삼스럽지 않다. 하지만 너나 할 것 없이 취임한 지 고작 20여일밖에 안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도마에 올려 놓고 난도질 하기에 여념이 없다. 분명 지금껏 볼 수 없었던 이상 기류다. 대중은 왜 이토록 ‘트럼프 비틀기’에 골몰할까.
국경을 초월한 트럼프 때리기
미국 정치풍자의 역사는 길다. 1950년대, 표현의 자유를 박탈했던 ‘매카시즘’ 시대가 지나가자 60년대부터 패러디ㆍ풍자 형태의 TV 정치 코미디가 하나의 장르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75년 첫 전파를 탄 SNL은 권력의 정점인 대통령을 겨냥한 정치풍자의 효시로 꼽힌다. 코미디언 셰비 체이스는 당시 제럴드 포드 대통령의 몸 개그를 우스꽝스럽게 묘사해 큰 인기를 끌었다. 이후 지미 카터, 조지 부시 부자, 빌 클린턴, 버락 오바마 등 미국 대통령은 예외 없이 풍자의 단골소재가 됐다. 다만 지금까지는 대통령의 말이나 신체적 실수를 포착해 웃음거리로 만드는 방식이 대세였다. 가령 클린턴의 여성 편력, 조지 W. 부시의 낮은 지적 능력 등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비웃음을 유발하는 식이다.
트럼프는 확실히 다르다. 일거수일투족이 전부 먹잇감이다. 그가 반(反)이민 행정명령에 서명하면서 “불법이민자는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변하자 한 원주민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그러는 넌 언제 나갈건데?”라는 글을 올렸다. 트럼프 지지층인 백인들 역시 먼 옛날 침략자였다는 사실을 상기시킨 것이다. 트럼프의 ‘문제아’들도 감시망에서 자유롭지 않다. 미 프로농구(NBA) 휴스턴 로케츠의 마이크 댄토니 감독은 얼마 전 패배가 잦은 이유를 묻는 질문에 “실제로 우리는 모든 경기를 이겼다. 그게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이라고 답했다. 대통령 취임식 참석 규모를 부풀리다 거짓이 들통나자 해괴한 논리를 댄 스파이서와 켈리앤 콘웨이 백악관 선임고문을 빗댄 유머였다. 대선 기간 트럼프의 성희롱 발언, ‘미국 우선주의’를 패러디한 영상 등도 각국 버전으로 제작돼 온라인을 뜨겁게 달구는 등 트럼프 풍자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전 지구적 현상으로 확산되고 있다.
풍자는 트럼프 제어하는 강력한 무기
다양한 소재는 끊이지 않는 트럼프 풍자의 가장 큰 자양분이다. 대선 후보 시절부터 트럼프 역할을 하며 열연을 펼치고 있는 배우 알렉 볼드윈은 최근 월스트리트저널과 인터뷰에서 “SNL의 메인작가(head writer)는 트럼프”라고 못박았다. ‘트위터 정치’의 개척자답게 대통령이 먼저 정부정책은 말할 것도 없고 인종차별, 여성관 등 민감한 내용을 하루에도 십수건씩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리는 통에 굳이 재료를 찾느라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풍자가 트럼프를 향한 분노를 단순히 배설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의 정치적 영향력에 균열을 내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유명 코미디언 니키 글레이저는 미 일간 워싱턴포스트(WP)에 “코미디와 풍자가 트럼프에 맞서 싸울 정치적 무기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무척 흥분된다”고 말했다.
여태껏 미국 대통령들은 거친 언사를 접해도 겉으론 짐짓 여유를 부리기 일쑤였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열성 공화당원인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연단 옆에 빈 의자를 놓고 대화하는 퍼포먼스를 했다. 공약을 성실히 이행하지 않은 오바마 대통령을 비난하기 위해 투명인간 취급한 것이다. 그러자 오바마는 “나는 그의 열렬한 팬”이라며 “정치인이 쉽게 화를 내면 다른 직업을 찾아야 한다”며 능숙하게 맞받아쳤다.
반면 트럼프는 “재미도 없고 정말 나쁜 방송”이라며 SNL을 대놓고 힐난했다. 미 정치전문지 폴리티코에 따르면 트럼프는 측근들이 유약한 이미지로 비쳐지는 것을 싫어한다고 한다. 하물며 핵심 참모 스파이서를 여배우가 연기하며 한껏 조롱했으니 적잖이 충격을 받았을 게다.
트럼프가 풍자와 패러디를 극도로 경계하는 것은 ‘정치 언어’의 위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다. 트럼프는 2004년부터 10년 이상 자기 기업 신입사원을 뽑는 리얼리티 쇼 ‘어프렌티스’를 기획하면서 말과 이미지의 파급력을 체득했고, 선거전에 그대로 차용했다. WP는 “트럼프는 유세 도중 ‘내가 대로 한복판에서 총으로 사람을 쏴도 유권자들은 지지할 것’이라고 했는데 지지층을 향한 표적 마케팅으로 매우 탁월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제 권력자의 입장에서 과도한 이미지 훼손을 부르는 풍자 공세는 반드시 막아내야 할 부메랑이 됐다. 거꾸로 반 트럼프 진영은 정권에 실질적 타격을 줄 수 있는 수단을 획득한 셈이다.
미 시사주간 타임은 지난해 트럼프가 대선 후보로 한창 주가를 올릴 당시 그의 권부 입성 과정을 조명하며 “정치가 점점 유명세에 기대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래도 국정을 운영하는 일은 쇼 프로그램과는 분명 다를 터. 약자의 언어 풍자가 독불장군 트럼프를 변화시킬 수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
김이삭 기자 hir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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